9,10월엔 학교 아예 빠지고 하루종일 학원 … 도 넘은 예중 입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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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오전 10시 서울 강남구의 M 미술학원. 초등학생 30여 명이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방학도, 그렇다고 학교가 파한 오후도 아닌, 평일의 오전 풍경이다. 학교가 아닌 학원에 모여 있는 이 학생들은 누굴까. 답은 입시생들이다.

글=정현진 기자 , 사진=김경록 기자

지난달 중순 전국 대부분의 초등학교에서 6학년 2학기가 시작됐지만 이들은 벌써 한 달째 학교 수업을 빼먹고 이렇게 아침부터 하루 10~12시간씩 사설 학원에서 다음 달 있을 예술중학교 미술과 입시를 위한 실기시험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시험 전 최소 두세 달은 학원에서 집중 지도를 받아야 예중에 합격한다”며 학부모는 아이를 학교 대신 학원에 보내고, 학교는 “막을 방법이 없다”며 눈 감아준다. 초등학교 과정은 의무교육이라는데 초등 6학년 교실조차 입시 탓에 이렇게 파행적으로 운용되고 있는 것이다.

평일 오전에 한 미술학원을 찾았다. 원장과 마주 앉아 이런저런 상담을 했다. 원장실 너머로 그림 그리는 아이들이 보였다. “학교 안 가고 다들 여기 있네요”라고 물었다. 원장의 답. “예중 준비하는 초등 6학년 애들인데 8월부터 하루 10~12시간씩 이렇게 해요. 예중 준비하는 애들은 다 이렇게 학교 빠지고 와요. 학교에서도 애들 상황 아니까 군말 없이 수업 빼줍니다.” 이어진 원장의 말. “학교 수업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들 집에서 개인 과외 받아요.” 학교 갈 시간에 실기 준비 위해 학원에 가고 학원 가느라 못 한 공부는 또 다른 사교육으로 대체한다는 말이다.

 11~12일 초등학교 수업이 한창인 오전 9시~낮12시 강남 일대 미술학원 5곳을 돌았다. 다섯 곳 모두 오전 9~10시에 예술중 입시반 수업이 시작됐다.

 한 학원의 미술강사는 “오전 9시30분이면 애들이 도착한다”며 “간혹 깐깐한 담임을 만나면 ‘1교시는 듣고 가라’고 하는 경우는 봤어도 학교에서 수업을 안 빼준 적은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했다. 이날 확인한 학원만 계산해도 대략 50명의 초등 6학년생이 학교를 나와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학원 앞에서 만난 한 학부모는 “실기 비중이 워낙 높기 때문에 이렇게 안 하면 합격할 수 없다”며 “시험이 있는 10월까지는 대부분 학교 안 가고 개인 레슨을 받거나 학원을 찾는다”고 말했다. 의무교육인 초등학교 교육이 입시에 밀려 뒷전으로 내쳐진 것이다.

 서울 소재 예술중은 예원학교(정동)와 서울선화예술학교(능동) 두 곳이 있다. 올해 예원학교 미술과는 94명, 선화예술학교 미술과는 107명을 모집한다. 매년 모집 인원은 비슷하다. 최근 6년 예원학교 미술과는 평균 2.8대 1, 선화예술학교 미술과는 2.34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매년 최소 500여 명이 이 두 학교를 준비하는 셈이다. 다시 말해 학교를 빼먹거나 그럴 유혹을 받는 인원이 이렇게 많다는 얘기다.

 예중 입시는 정말 학교 빠지고 학원에 올인해야만 합격할 수 있는 걸까. 예중 입시생 부모들이 그렇게 믿는 이유는 선발 방법에 있다. 분당에서 10년째 미술학원을 운영 중인 김모씨는 “예고나 미대는 실기뿐 아니라 내신도 당락에 큰 영향을 끼치지만 예중은 내신을 포함해 학생부 자체를 아예 반영하지 않는다”며 “학부모들이 학교를 빼먹고 학원에서 집중 지도를 시키겠다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라고 말했다.

 예원학교는 실기100점+면접10점, 선화예술학교는 실기90%+면접10%, 분당의 계원예중은 실기100점+면접15점의 방법으로 학생을 뽑는다. 면접에선 국어·수학·사회·과학 등 학력 수준을 묻는 기초적인 질문을 한다. 학력수준을 확인한다곤 하지만 요식적이라는 평이 많다. 김모씨는 “구술면접은 어렵지 않다”며 “실기가 당락을 좌우하기 때문에 실기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홍익대 한 교수가 2012학년도 미술계열 실기 전형에 제출된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홍익대는 2009학년도 입시부터 미술계열 실기전형 선발 인원을 줄여오다 2013학년도부터 완전 폐지했다.

초등학교에서 이수한 각 과목에 대한 평가는 물론 출결 등 초등학교를 얼마나 충실하게 이수했는지 여부는 아예 평가 대상이 아니다. 입시안 자체가 사교육을 조장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많은 미대 지망생이 선호하는 홍익대가 미술 계열에서 무실기전형·서류평가 방식으로 학생 선발 방법을 바꾸면서 예중 입시가 더 과열됐다는 의견도 있다.

미술학원 원장들은 “홍익대가 서류평가만으로 학생을 선발하다 보니 자연스레 스펙에서 유리한 예고 학생이 대거 합격했다”며 “예중 졸업생 90%가 예고에 진학하기 때문에 예술중→예고→홍대로 이어지는 기차를 타려고 예중에 더 목을 매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학부모들이 아이를 학교에서 뺄 수 있었던 데는 제도적 허점도 있다. 현재 초등학교에선 학 학년 총 수업일수인 195일에서 3분의 2만 출석하면 다음 학년으로 진급할 수 있다. 다시 말해 65일을 무단결석해도 상급 학년 진학에 아무 어려움이 없다는 얘기다. 그리고 총 수업일수의 10%(19일)까지 체험학습 명목으로 학교를 빠질 수 있다. 결과적으로 1년 중 84일을 학교에 안 내보내도 다음 학년으로 진급이나 졸업에 문제가 없다.

 강남의 한 초등학교 교장은 “아이 인생이 걸린 문제라며 학부모가 간곡하게 부탁해오면 학교로선 난감할 수밖에 없다”며 “또 학부모가 작정하고 84일 동안 아이를 학교에 안 보내겠다고 해도 학교로선 막을 수 있는 방도가 없다”고 말했다.

 이런 사태에 대한 관리·감독 권한을 갖고 있는 서울시교육청은 “아는 바 없다”는 입장이다. 김재환 서울시교육청 초등교육과 장학관은 “단위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알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그런 보고는 들어 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8월 말까지 서울시교육청에서 근무했던 한 장학사는 전혀 다른 얘기를 했다. 그는 “종종 학부모가 학교를 빠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문의해온다”며 “예중 준비생들이 3개월 정도 학교를 빠지고 있는 실태에 대해 시교육청 관계자도 인지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워낙 소수다 보니 지금까지 특별히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송인섭 숙명여대 교육학부 명예교수는 “공교육을 살리자며 온갖 정책을 쏟아내고 있는 정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며 “소수라면 방치해도 된다는 논리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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