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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존슨, 이젠 도핑 반대 전도사 … 88올림픽 이후 처음 잠실 방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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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1988년 9월 24일 서울올림픽 육상 남자 100m 결승에서 벤 존슨(사진 왼쪽)은 칼 루이스(오른쪽)를 제치고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하지만 약물 복용 사실이 드러나 금메달을 박탈당했고, 그의 육상 인생도 끝났다. [뉴스1]

한국은 스포츠 강국이다. 2010 밴쿠버 겨울올림픽과 2012 런던 여름올림픽에서 잇따라 세계 5위를 차지했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슬로건 아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 한국 체육의 지상과제였다. 모든 스포츠 시스템도 그것에 맞춰졌다. 그러나 21세기 한국 사회는 체육계에 그 이상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 스포츠를 짓눌렀던 승리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승부조작을 척결하고 ▶약물을 근절하며 ▶선수 인권을 강화하고 ▶체육행정을 선진화하는 등 스포츠 환경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가꿔 나가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금메달이 아니라 스포츠 윤리가 한국 스포츠의 새로운 화두다.

“나 같은 사람이 다시는 나와선 안 된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예방과 교육이 절실하다.”

 1988년 서울올림픽 약물 스캔들의 주인공 벤 존슨(52)이 24일 잠실 주경기장을 찾았다. 호주 스포츠의류업체 스킨스가 추진하는 캠페인 ‘PURE SPORT’의 전도사로 반(反)도핑을 알리기 위해서다. 88올림픽 당시 벤 존슨은 금지약물인 아나볼릭 스테로이드(근육강화제)를 복용한 사실이 드러나 육상 100m 금메달을 박탈당했다. ‘약물 탄환’으로 낙인찍힌 채 어둠 속에서 25년을 살았다.

 그런 그가 대중 앞에 나섰다. 88올림픽 당시 뛰었던 6번 레인에서 반도핑 퍼포먼스를 펼친 벤 존슨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동안의 고충을 털어놓고 반도핑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존슨은 약물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위해 25년 만에 다시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을 찾았다. 당시 존슨이 뛰었던 6번 레인에는 약물에 반대하는 팬들의 서명이 담긴 흰색 천을 깔았다. [뉴스1]

 - 25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기분이 어떤가.

 “특별히 슬프다거나 하지는 않다. 아픔은 어느 정도 극복했다. 잘못을 인정하고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

 - 경기력 향상 약물에 처음 손을 댄 계기는.

 “당시 코치가 ‘다른 선수들도 다 복용한다. 경쟁하려면 너도 복용해야 한다’며 권유했다. 1~2주 고민 끝에 하겠다고 했다. 처음엔 그게 얼마나 나쁜 행동인지 모르고 코칭스태프가 시키는 대로 했다.”

 - 약물 복용 후 당신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나.

 “이전에는 많은 돈을 벌었고 명성도 얻었다. 하지만 약물 스캔들 이후 모든 것을 잃었다. 선수 생활을 마친 후에도 육상에 모든 것을 바치려 했지만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약물 복용으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딴 메달 5개를 반납한 미국 육상 단거리 여자 스타 매리언 존스. [중앙포토]

 벤 존슨은 약물 파동 후 경제적으로 어려워져 가족과 떨어져 혼자 지냈다. 1990년대 말 리비아 지도자였던 무아마르 카다피의 아들과 디에고 마라도나의 트레이너를 맡기도 했지만 육상계로 다시 발을 들이지는 못했다.

 - 반도핑 전도사로 나서는 게 쉽지 않 을 텐데.

 “스킨스가 추진하는 캠페인의 취지에 신뢰가 갔다. 약물을 복용해 봤던 사람으로서 그 입장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핑은 심각한 부작용을 동반한다. 벤 존슨이 복용한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는 신체적으로 뇌졸중, 심근경색, 간 종양 등을 유발하며 정신적으로는 우울증, 환각, 편집증을 가져올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억울한 감정이 있는 것 같다.

 “당시에는 다른 선수들도 약물을 복용하는 일이 잦았다. 25년 전 약물 복용으로 인해 지금까지 고통받고 있다. 오랫동안 비난받고 벌받는 것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다.”

  - 약물 복용을 근절하기 위한 방안은 뭘까.

 “나는 약물 복용이라는 인생 최악의 선택을 했다. 나이가 들며 그게 위험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지난 25년 동안 바뀐 것은 거의 없고, 약물 복용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처벌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선수들이 잘못된 길로 빠져들지 않도록 예방과 교육이 절실하다.”

 - 약물 유혹을 받는 선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좋은 코치를 만나 적절한 훈련과 교육을 받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나처럼 되지 않는다. ”

오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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