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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제2화>무성영화시대|신일선(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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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내가 이경손 감독의 『봉황의 면류관』에 출연하고 춘사가 『풍운아』를 만든 다음 바로 나는 나 선생이 각본·감독한 「키네마」사의 제4회작 『들쥐』에 출연했다.
이 『들쥐』에는 『장한몽』에서 이수일로 분했던 미남배우 주삼손씨가 주연이었고 나 선생과는 죽마고우며 같이 감옥생활까지 했던 윤봉춘씨가 영화계에 「데뷔」, 처음으로 출연했다. 『들쥐』는 애끓는 연인을 둔 어느 가난하나 집안의 여학생이 부친의 강요로 돈에 팔려 부잣집에 시집을 가게 된다. 이때 의적단이 잔칫집에 뛰어들어 손님들을 내쫓고 신부를 납치해다 평소 사랑하던 두 남녀의 뜻을 이뤄준다는 내용이었다.
이 영화는 주로 청량리 근반에서 촬영을 했는데 나는 가난한 여학생이었고 윤봉춘씨가 악질 시골 부자역이었다.
주삼손씨가 나의 상대역이었는데 이무렵 그와 나 사이에는 터무니 없는 「스캔들이」이 퍼져 골치였다. 심지어는 두 사람이 곧 결혼하게 할 것이라는 엉뚱한 소문까지 나돌았는데 당시 21세이던 주삼손씨는 『들쥐』다음 『금붕어』에서 나와 공연한 후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아주 가버렸다.
나운규씨는 『금붕어』를 끝으로 조선 「키네마」사를 떠나 별도로 나운규 「프로덕션」을 차렸다. 단성사 주인인 박승필씨의 재정적인 뒷받침으로 서울 창신동에다 사무소를 두고 본격작인 제작에 들어갔는데 연기진에는 윤봉춘 이금룡 이경선 홍개명 김연실 김옥씨 등과 나도 끼어 있었다.
나운규 「프르덕션」은 27년부터 29년까지 있었는데 이때 만들어진 것이 『잘있거라』 『옥녀』 「사나이』 『벙어리 삼룡』 『사랑을 찾아서』 등이었다.
김연실 김옥씨 등이 출연하는 『잘있거라』가 만들어 지는 동안 나는 김철산 감독의 「쾌인의 정체』에 출연했다. 이 영화는 우리 나라 최초의 「드릴러」 탐정물로서 내용은 형편없었지만 흥행적으로는 성공을 거둔 작품이었다.
내가 여 기자역을 맡았던 이 영화는 눈이 펄펄 날리는 겨울철에 도봉산에서 「로케이션」을 가졌는데 내가 비행기를 타고 괴인을 찾아 나서는 「신」을 찍게 되었다.
당시 비행기라곤 낡아빠진 단발기 1대뿐이었고 비행사도 한국 최초의 비행사였던 안창남씨기 죽은 뒤 그의 제자였던 이기현씨 한 사람 밖에 없었다.
조선인 전용 비행장이 노량진에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노량진까지 전차 선로가 놓이지 않아 모두들 걸어다니느라 고생이 많았고 그때도 나만은 인력거를 태워주웠다.
그러나 비행기가 고장나 헛걸음만 하다 1주일만에 간신히 「엔진」을 고쳤고 이기현 비생사는 손으로 「프로펠러」를 돌리는데 성공, 나를 태우고 이륙했으나 5분도 못돼 주저앉고 말았다.
그래서 비행기가 뜨는 장면과 착륙해있는 장면만 찍을 수밖에 없었으니 화면은 엉망이었다.
심훈씨가 감독한 『먼동이 틀 때』에 출연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소실 『상록수』로 더 유명한 심 훈씨는 그때 영화에 관계했는데 배우로는 이경손 감독의 『장한몽』에서 수일역으로 한 번 출연했고 감독도 이 작품뿐이었다.
심훈씨는 『장한몽』에 출연한 다음 일본으로 건나가 영화 연출법을 배우고 돌아왔다. 당시만 해도 새로운 이동 촬영법을 제대로 썼고 일본에서 갖가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서 훌륭한 영화를 만들었다.
심훈씨의 본명은 대섭이었고 당대의 미남이었다. 제일고보를 나온 그는 머리가 뛰어난데다 짖궂은 장난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는 1929년 당시의 영화잡지 「조선영화」에 『10년 후의 영화계』라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글을 쓰기도 했다.
『…또 한가지는 근자에 발명되어 성행하는 전송사기의 원리를 이용하여 「라디오」의 방송을 들 듯이 안방에서 또는 응접실의 「소파」에 기대어 앉아서 맞은편 벽에 발성하는 입체 영화를 볼 수가 있게 될 것이요 듣게 될 것도 그다지 의아할 것이 없는 사실이 될 것이다.
일정한 장소인 상설관으로 가서 묻혀 앉아야만 볼 수가 있는 폐단도 없어지고 비싼 입장료도 바칠 필요가 없이, 「라디오」의 광석기나 진공관과 같은 장치만 해 놓고 있으면 한 달에 단돈 1원 2원의 청취료 또는 착취료만 내고 몇 십명의 가족이 모여 앉아듣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려나 한가지 부언해돌 조건은, 전 인류 중에서 1939면5윌12일까지 황천의 「아스팔트」를 밝을 운명을 가진 사람들에게 향하여는 마음놓고 예언을 한다는 것이다.』
이 『먼동이 틀 때』에는 나와 강홍식씨가 출연했는데 『장한몽』에서 처럼 주연배우인 강홍식씨가 촬영 막마지에 행방불명이 되어 소동이 일어났었다. 그래도 『장한몽』에서는 촬영중간쯤이라 배우를 바꿔칠 수도 있었지만 여기서는 촬영을 3일만 더하면 끝나는 때라 더 큰 일이었다.
심훈 감독은 사흘동안 그를 찾아온 장안을 샅샅이 뒤지다 끝내는 창가의 어느집 2층 뒷방에서 찾아대고야 말았다. 영화에 출연하다말고 유곽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꽤씸하기도 했겠지만 그러나 우선 촬영을 끝내고 볼일이라 심훈 감독은 40원의 유흥비마저 치러주고 그를 데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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