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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제자는 필자|신 여성교육(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15년, 서울 장안에 큰 화젯거리가 생겼다. 중등과 1회 졸업생인 최활난 선배가 당시 YMCA에서 일보던 최재학씨(현82세) 정동교회에서 이른바 신식결혼식을 올렸기 때문이다. 족두리에 연지곤지를 찍고 감히 신랑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시집을 가야했던 당시에 최 선배가 「오르간」 「웨딩마치」에 맞춰 신랑의 팔을 끼고 「드레스」를 늘어뜨리며 결혼식을 올렸다는 사실은 여간 큰 화제가 아니었다.
그때 신여성들은 부러움에 들떠 야단이었지만 구습에 젖은 당시 사회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때 결혼식 며칠 전부터 식장구경을 가려고 별렀었으나 결혼식시간이 하오 1시인 수업 때라 그만 가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른 일이 생각난다.
최 선배는 이화중등과 재학도중 학교의 주선으로 일본에 유학, 「나가사끼」 활수여학교를 졸업한 뒤 하급반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정동교회 최초의 교회 「오르간」주자이기도 한 최 선배는 굉장한 고수머리에 얼핏보기에는 총각처럼 우락부락하게 생겼으나 일본에 다녀온 뒤 최초로 「트레머리」에 구두를 신어 화제를 불러일으킨 대표적인 신여성이었다.
그때 이 결혼이 우리 나라 최초의 신식결혼이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초기에 입학했던 김 「룻세」씨가 1897년에 신식결혼을 했다는 기록과 1907년에 윤치호씨가 신식결혼을 했다는 다른 기록이 남아있어 확실치 않은 것 같다.
3·1운동 이후에는 신식결혼이 부쩍 늘었는데 키와 몸집이 작고 귀엽게 생겼다고들 해서 나는 친구들 결혼식에 들러리로 자주 뽑혔다.
23, 24년께 현 공화당 의장 서리 윤치영씨와 이은혜씨가 정동교회에서 결혼할 때와 중등과 동창생이던 김정렬(당시 학당 보통과 선생)이 목사인 약혼자와 결혼할 때 등 5, 6차례나 들러리를 서봤으나 나는 장난기를 좋아한 탓인지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일본 유학시절에 윤씨와 사귄 이은혜씨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10회 졸업생으로 나보다 나이가 두 살 위였다.
이씨는 졸업 후 한때 이화학당보통과의 일본말교사로 부임해와 당시 대학과에 다니던 나와 같은 기숙사에 있게 되어 자연히 친하게 되었다.
나이와 직책 때문에 부를 때는 내가 선생이라고 했고 편지를 쓸 때는 형님이라고 했으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당시에는 특별히 친한 동성친구를 『사랑하는 사이』라고 불렀다.
숙명을 졸업한 이씨가 이화에 부임한 것을 엄비가 세운 숙명이 엄비의 설립의도에 따라 일본식 교육을 모방, 일본말을 필수과목으로 했기 때문에 학당출신보다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씨는 현 이대문리대 김갑순 학장 부모님을 수양부모로 삼고 있었는데 이것은 장로교회에 다니던 김 학장 부모가 같은 교회에 다니던 이씨를 귀여워해서 수양딸로 삼았던 것 같다.
여 선교사단의 학교설립목적은 우리 나라 여성들에게 기독교정신을 넣어준다는 선교의 목적이 주였으나 근로정신을 가르쳐 자립하는 힘을 길러준다는 목적도 있었다.
황신덕 중앙여고이사장이 다니던 때의 평양 숭의여학교에서는 지방에서 와서 기숙사생활을 하는 학생들의 월사금을 벌어준다는 명목으로 오전에 수업이 끝나면 오후에는 수공예품이나 편물 등을 만들게 하여 미국에 보내 돈을 받아주었고 그밖에 약식이나 떡을 만들게 하여 평양 시내에 있던 서양사람들에게 팔아 돈을 벌게 했다 한다.
이화에서는 청소부가 집안 일로 시골에 간 동안 학생들에게 청소를 시키고 청소부의 월급을 나눠준 일이 있었으며 몇몇 학생은 선교사들의 잡일을 해주어 약간의 돈을 받기도 했다.
나는 「우드」·「아펜셀라」·「처치지」 등 선교사들의 의복 다듬이질, 방소제 등 일을 해주고 매달 얼마씩의 용돈을 받았으나 월사금을 낼 수 있을 정도로 큰돈은 아니었다.
이 용돈은 연필·공책 등 학용품 값과 편지지, 우표 사는데도 사용했지만 대부분이 김보린 김정렬 등 친구들과 군것질로 써버렸다.
당시에는 호떡과 군고구마, 눈깔사탕 등이 학생들이 즐겨 사먹는 대상이었다.
최활난 선배를 비롯, 이화숙 신마숙 정애식(이상 대학과 1회) 선배와 박인덕 선배(대학과 3회) 등이 대학을 졸업했거나 재학 중에 중·고등과에서 교편생활을 했다.
현재 미국에 계신 이화숙 선배와 신마숙 선배는 무슨 과를 담당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나 12년부터 l6년까지 재직했고 본명이 김애식 또는 김「애리시」인 정 선배는 미국유학에서 돌아와 모교에서 30여년간 봉직하면서 음악과 창설에 공을 세웠으며 현재 인덕여자실업학교재단 이사장인 박인덕 선배는 기하와 음악을 가르쳤다.
선생이 워낙 모자라던 시절이라 졸업생을 바로 채용했으나 부모보다도 더 존경하고 어려워해 선생님대접을 깍듯이 했고 머리만 조금 아파도 선생을 찾는 등 무슨 일이고 선생과 상의해서 해결하는 풍조가 지배적이었다. <계속> 【서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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