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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파 증권맨 ‘명함’ 던지고 오늘도 행복 페달 꾹~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이인재 아띠 인력거 대표가 관광객을 태우고 서울 북촌 골목을 달리고 있다. 이 대표는 “헌법재판소 주변 골목에는 운치가 있어 좋다”고 했다. 최정동 기자

2009년 어느 봄날 미국 웨슬리언대 캠퍼스. 한국인 유학생 한 명이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었다. 뒤에 휠체어를 연결한, 특이한 자전거였다. 유학생의 이름은 이인재. 친한 여학생의 동생이 캠퍼스를 방문했는데 다리가 불편해 걷지를 못했다.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 있다’고 묘사한 캠퍼스였다. 궁리를 거듭하다 ‘휠체어 자전거’ 아이디어를 냈다. 100만㎡의 캠퍼스를 구석구석 누비며 몸은 고됐지만 친구 동생의 함박웃음을 보며 마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4년 뒤 스물일곱이 된 그는 서울 북촌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다. 이번에도 자전거가 예사롭지 않다. 성인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인력거다. 뙤약볕을 가려주는 차양도 곁들였다. 뒤엔 ‘아띠 인력거’라는 로고가 새겨져 있다. 2009년의 추억을 살려 창업한 자전거 인력거 회사다. 한국에 돌아와 외국계 증권회사에 들어갔다가 이내 그만두고 지난해 아띠 인력거를 창업했다. ‘아띠’는 순우리말로 ‘오랜 친구’라는 뜻이다.

아띠 인력거는 미·유럽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자전거식 이동수단 페디캡(pedicab) 방식이다. 페디캡은 모터로 움직이나 아띠 인력거는 인간의 두 다리로만 움직인다. 이 대표는 “지난해 7월 영업 개시 이래 지금까지 5000명 넘는 사람들을 태웠다”고 했다. 그가 보여준 기록엔 승객 수가 매달 두 배가량 늘고 있다. 지난 5월엔 400여 명, 6월엔 800여 명이 아띠 인력거를 탔다. 인터뷰 중에도 예약 전화는 계속 걸려왔다. 2대로 시작했던 인력거는 6대로, ‘인력거꾼’ 대신 ‘라이더’로 불리는 직원은 15명으로 각각 늘었다. 지난 5월엔 한국관광공사의 창조관광사업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아띠는 ‘오랜 친구’라는 뜻의 순우리말
아띠 인력거는 이동수단을 넘어서서 문화 전도사 역할을 한다. 서울의 북촌·서촌 일대를 돌며 골목 명소를 둘러보는 ‘역사 코스’, 데이트족을 겨냥한 ‘삼청동 로맨스 코스’가 있다. 성인은 2만5000원, 학생은 1만5000원을 받는다. 손님 가운데 20%는 외국인 관광객이다. 이들에겐 이 대표가 직접 영어로 북촌을 소개한다. 지난달 30일 북촌에서 이 대표의 인력거를 쳐다보던 중국인 장시(Zhang Xi·28)는 “마냥 걸으면 피곤한데 인력거를 타면 이곳저곳을 효율적으로 둘러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서울 시민들도 아띠 인력거의 주 고객이다. 지난달 30일 인력거를 탄 박지민(28)씨는 “인력거 위에서 보는 북촌은 새롭다. 북촌의 숨은 이야기도 듣고 경치도 구경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며 즐거워했다. 두산 박용만 회장과 음악가 노영심씨도 아띠 인력거 고객이다. 인력거를 인연으로 노씨와는 ‘누나’ ‘동생’ 하는 사이가 됐다.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쓴 김난도 서울대 교수는 최근작 『내:일』에서 이 대표를 ‘국내 유일의 인력거 업체를 운영하는 북촌의 유명인사 청년’이라고 소개했다.

이 대표도 처음부터 사업을 꿈꾸진 않았다. 귀국 후엔 외국계 금융회사인 맥쿼리증권에 들어가 법률 업무를 맡았다. 이른바 ‘잘나가는 코스’를 밟는 듯했다. 그는 “유학까지 보내주신 부모님께 마음의 빚이 있어, 내가 아닌 부모가 원하는 직장을 찾았던 것 같다”고 했다. 정장 차림에 답답함을 느꼈지만 조직 생활은 즐거웠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서울 정동 사무실에서 덕수궁을 내려다보다 “서울에도 인력거가 있으면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할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대학 졸업 후 친구들과 재미로 보스턴에서 자전거 인력거 아르바이트 사업을 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미국에서 놀러 오는 친구들에게 고궁·박물관 구경을 시켜주고 나면 볼거리나 놀거리가 별로 없다는 사실도 불만스러웠던 차였다. “고궁도 하루이틀이죠. 색다른 방식으로 서울을 즐기는 방식을 찾아보고 싶었어요. 마침 인력거 사업은 아무도 안 하고 있더라고요. 내가 처음 하는 일이라면 더 가치가 있겠다 싶었죠. 처음부터 거창하게 서울 역사를 알리겠다고 시작한 건 아니에요. 그냥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었던 거죠.” 두 달 후, 회사에 사표를 냈다. 정장을 벗고 티셔츠 차림에다 운동화 끈을 동여맸다.

미국인 친구와 뜻을 모아 1000만원을 마련했다. 서울 원남동에 마련한 반지하 차고에서 숙식하며 사업을 꾸렸지만 인력거를 마련하는 것부터 문제였다. 국내엔 생산 공장이 없어 나라 밖 업체들을 수소문한 끝에 인력거를 두 대 사들였다. 어느 지역 공장인지는 영업상 비밀이다.

손님을 찾을 수 없는 것도 문제였다. 인력거를 처음 본 사람들은 경계의 눈빛을 보내기 일쑤였다. 북촌 동네에 마실 나온 할머니들부터 무료 승객으로 모셨다. 모르는 사람들을 봐도 “안녕하세요” “수고 많으시네요”라며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북촌 토박이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이 대표의 진심에 감동한 식당·가게 주인들이 손님들에게 입소문을 내줬다. 어떤 업주는 자신의 지갑을 털어 손님에게 인력거를 태워주기도 했다. 창업 동업자였던 미국인 친구는 사업을 중도 포기하고 돌아갔지만 함께하는 라이더들은 늘었다. 아띠 인력거는 이제 북촌의 마스코트가 됐다. 북촌에서 8년째 식당을 운영해온 허식(60)씨는 “동네 문화 사절단 역할을 해주는 데다 젊은이가 꾀 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돈을 벌겠다는 게 장하다”고 했다.

대학에서도 역사학을 전공했으니 북촌 역사 지킴이가 될 운명이었던 건 아닐까. 그는 뜸 들이지 않고 곧바로 “아니다”라고 답했다. “역사가 재미있긴 했지만 뜻이 있어서 역사학을 택한 건 아니었어요. 고백하자면 역사 강의의 시험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더라고요. 대부분 학기말 보고서만 쓰면 돼 선택했죠.” 그러면서 “나중엔 보고서 쓰느라 더 고생했다”고 털어놓았다.

이 대표가 유학길에 오른 건 중3 때. 조기 유학인 셈이다. 자유도 있었지만 뭔가 답답했다. 무리해서 유학을 보낸 부모님에겐 미안함이 컸다. “보딩스쿨로 조기유학을 올 만한 가정형편이 아니었다는 사실과 내 의지로 와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힘들었죠. 그런데도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못 한다는 것도 답답했죠.” 하지만 졸업 후 인력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이런 복잡한 마음은 많이 사라졌다.

인력거 위에선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사람의 힘으로만 움직이는 느림의 미학을 체험할 수 있다. 인력거 위에서 스마트폰은 설 자리가 없다. 이 대표가 해주는 설명엔 스마트폰에서 찾을 수 없는 인간의 스토리가 있다. 왜 북촌을 택했는지 묻자 “북촌의 역사를 알리겠다는 거창한 목표는 없었습니다. 청계천·덕수궁 등 여러 곳을 다녔는데 그냥 북촌이 제일 예쁘더라고요. 여기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도 찾아 읽고 자료도 많이 봐요. 알면 알수록 매력이 넘치는 곳이에요.” 지금은 북촌 전문가가 다 됐다.

정동과 지방도시로 사업 확장 계획
인력거의 잔 고장도 스스로 해결하는 편이다. “어렸을 때 꿈이 과학자였거든요. 라디오를 납땜하거나 기계 만지는 게 좋았어요.” 그는 인력거 수리뿐 아니라 작은 발명도 해냈다. 페달을 밟을 때 더 안전하고 힘이 덜 드는 방법을 고민하다 산악 자전거에서 힌트를 얻었다. 운동화 밑창에 특수 고리를 부착해 페달을 밟을 땐 발을 고정시킬 수 있게 하는 장치다.

인력거를 타는 손님들과의 인연도 이 대표에겐 자산이다. “스위스 교포 모녀가 탄 적이 있어요. 어머니가 예약을 했는데 딸에게 깜짝 생일 잔치를 열어주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투어 후에 1000스위스프랑(약 116만원)을 쥐여주시는 거예요. 여행 도중 딸과 많이 다퉜는데, 인력거에서 대화로 풀 수 있었다고 했어요.” 이 밖에도 로맨스 코스를 이용해 깜짝 프러포즈를 한 커플, 제주도에서 관광업을 하느라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초등학생 남동생과 함께 인력거를 타러 온 중학생 손님도 기억에 남는다.

손님들이 지켜야 하는 원칙도 있다. “인력거를 타고 미안해하는 분이 많으세요. 왜 그러시는지 이해가 안 돼요. 저희는 이게 좋아서 직업으로 하고 있거든요. 좋아하는 일도 하고 운동도 하고 돈도 버는 걸요. 손님들은 서비스 대가를 요금으로 치르시잖아요. 당당히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신 가격 흥정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그는 앞으로 서울 정동과 지방도시에까지 인력거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다. 전북 군산의 지역 축제에도 진출할 계획을 세웠다. 궁극적으론 뉴욕·보스턴의 페디캡처럼 체계화된 시스템을 갖추는 게 목표다. 미국에서 페디캡 사업의 경우 별도의 사업 허가증이 발급되고 안전 수칙이 법률로 정해져 있다.

아무나 아띠 인력거의 라이더가 될 수는 없다. 진짜로 이 일을 하고 싶은지 판단하는 면접을 거친 후 한 달간 운전 연습과 안전수칙 훈련을 거친다. 라이더들 사이엔 특별한 문화도 있다. 나이나 직급으로 호칭이 달라지는 게 싫어 서로를 별명으로 부른다. 이 대표는 영문 이름 첫 글자를 딴 ‘IJ’, 다른 라이더들은 ‘갈매’ ‘준’이라고 불린다. 존댓말은 오래전에 퇴출했다. 최고령 라이더인 81년생에게도 다들 반말을 쓴다.

이 대표의 목표는 ‘즐겁게 사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고 싶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 해도 귀찮은 일이 많이 따라오는데, 싫어하는 일은 아예 엄두가 안 난다”는 것이다. “참 신기한 게, 인력거 모는 일 자체를 즐기면 저절로 돈이 벌리거든요. 저도 마음이 좀 복잡한 날이 있는데, 그럼 손님들이 아나 봐요. 그런 날은 손님이 별로 없거든요. 내가 즐거우면 그 행복이 남들에게 절로 전해지는 거죠. 계속 열심히 달릴 겁니다.”

전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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