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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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사람의 인연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다 같은 전주 이씨요, 이조말엽의 봉건시대에 성장한 이승만 대통령 시대에는 까닭도 없이 냉대를 받아온 영친왕이 혁명정부의 젊은 군인들에 의해서 도리어 우대를 받았다는 것은 참으로 요외의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영친왕의 잘못된 국적을 다시 고치고, 구한국 최후의 황태자로서의 권위와 명예를 유지케 하기 위하여 있는바 힘을 다 한 사람은 한일 양국을 통해서 부지기수로 많았고, 그일 때문에 20년 가까운 세월을 허비하였건만, 그토록 애를 써도 잘되지 않던 일을 하루아침에 해결해 준 이가 바로 박의장 이었으니 어찌 고맙다고 하지 않으리요. 더구나 봉건세대의 80노인이 마땅히 해주었어야 할 일을 현대의 구 황실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이가 대신 편의를 봐 주었으니 더욱 고마운 생각을 금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승만 박사는 위대한 애국자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분은 평생에 자식을 낳아본 일이 없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이역만리에서 동분서주하느라고 가정생활의 따뜻한 맛을 모른다.
따라서 영친왕에 대한 냉대도 그 근본은 이박사에게 인간으로서의 곰살궂은 인정이 결핍된 때문이 아니었던가 한다. 이 인정이라는 것은 정치문제이전의 휴머니즘에 속하는 것으로서 인간사회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 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영친왕에 대한 박대통령의 온정은 정치문제와는 별도로 칭찬 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어쨌든 그와 같이 박정희 의장(당시)의 말 한마디로 모든 현안이 전부 해결을 보게 되었으므로 나는 우선 덕혜옹주를 먼저 귀국시키려고 마쓰사와(송택)병원으로 가서 하야시(임)박사와 상의를 하고 오는 길로 우사미(우좌미) 궁내청장관을 만나 양해를 구했던 바 그들도 모두 쌍수를 들어 찬성하였다.
나이가 이미 50이 넘고 아무 것도 모르는 가여운 여인을 한사람 그대로 일본에 두어서 무슨 이익이 된단 말인가? 그리고 현재는 다행히 오라버님 영친왕이 계시므로 매월, 매월 입원비를 주시지만 만일 그분마저 아니 계시다면 문자 그대로 천애의 고아가 될 것이니 영친왕이 생존해 계신 동안에 얼른 귀국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국에 계신 윤대비와 운현궁 노공비도 대찬성이시므로 한국 정부에서도 구 황실 재산관리국으로 하여금 덕혜옹주의 귀국을 서두르게 되어 옹주의 조카가 되는 고 이금공(광도에서 원자폭탄에 희생된 분)비 박찬주 여사를 일본에 파견키로 되어 전도가 암담하던 덕혜옹주의 귀국문제도 의외로 빨리 실현케 된 것이었다.
박찬주 여사와 그 영식 이 종씨(그후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가 동경에 도착한 것은 1962년 1월16일이었는데 국적이 일본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애로가 많았었던 것을 일본측에서도 그야말로 『인도』문제라고 해서 최대한의 성의를 표시하여 궁내청과 외무성이 서로 협력하여 겨우 1주일만에 여권을 만들어 주었으므로 덕혜옹주는 그 덕분에 그 달 26일 노드·웨스트기로 일본에 온지 거의 40년만에 다시 조국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날 동경 하네다(우전)공항에는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궁내청과 외무성의 관계자가 많이 나와서 환송하였는데 특히 30여년전 덕혜옹주가 학습원을 졸업했을 당시의 학우들이 십수명이나 손에 손에 꽃을 들고 나와서 말도 못하고 사람도 잘 알아보지 못하는 이 가엾은 이국의 왕녀를 위하여 눈물의 전별을 하여 이채를 띠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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