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책임한 사회를 슬퍼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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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경서중학 참사를 보고>
14일 저녁 수학여행길에서 참변을 당한 경서중학교 학생사건은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자식을 가진 모든 어머니들은 소리 없는 통곡으로 그들의 무참한 최후에 대해 슬퍼하고, 이러한 참극을 벌여야 하는 사회에 대해 항의를 누를 수가 없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왜 이래야만 하는가?
이 마당에 누구의 책임을 추궁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이 다시없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반문하는 것이다. 문교부장관·교통부장관의 책임사표가 열장이 되더라도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부모의 통분한 마음을 달랠 수는 없는 일이다. 오직 이 분노와 슬픔을 커다란 안목에서 사회화하는 그 길만이 우리 모두의 구원이 될 것이기에, 이 참변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교통사고는 우리 주변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너무나 빈번히 일어나니까 그건 일어난 당사자들 문제로 국한시키고 모두 예사로 알게 되었으나 근본적으로 이 교통사고는 현대라는 상황에서 커다란 사회문제이며, 특히 이번과 같이 학교 학생들의 수학여행이란 단체행동이 참변을 당한 경우는 우리 모두가 당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학교에서 가는 수학여행이라면 학부모는 우선 안심하고 보낸다. 학교를 믿고 인솔 책임선생님을 믿기 때문이다. 선생이 학생들을 인솔해서 수학여행으로 기차나 버스를 타면 경험하는 일이지만 학생들은 단체라는 분위기 때문에 밖으로 탈선하려는 위험성을 늘 가지고 있다. 그것을 안으로 끌어 들여서 단체행동이란 규제 속에 묶어놓는 기능을 하는 것이 인솔교사의 책임이다. 불행히도 사고버스에는 인솔교사가 타지 않았었다는 보도다.
아이들의 노래 소리는 들뜨기 쉽고 운전사의 신경은 자극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사고직전에 『너무 시끄럽다』고 뒤를 돌아다보고 학생들을 제지한일도 있다니 이 운전사는 인솔교사의 부재 때문에 차내 분위기조성의 책임까지 지고 결국 자기책임을 다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결국 학교측 무책임은 운전사무책임으로 연쇄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차내 상황은 소란과 신경질뿐이었으니 운전사 귀에 무슨 소린들 들렸겠는가 추측이 간다.
차외의 형편은 또 어떤가. 일단 멈춤을 해야하는 기찻길 건널목이었는데 운전사는 멈춤의 규칙을 지키지 않고 열차와 충돌한 것으로 되어 있다. 건널목에는 자동경보 장치가 시설되어 있어 기차가 5백m 전방에 다다르면 땡땡 경보가 울리며 빨간 불이 깜박인다는 것이다. 위의 경보기가 제구실을 했는데도 운전사의 부주의로 기찻길로 질주할 위험성은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게 인간의 책임이지만 인간이란 부주의를 할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우선 우리는 가능한 한 모든 최선의 방법을 강구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번에 안 일이지만 이러한 위험한 건널목은 전국적으로 수도 없다고 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경보기 대신 완전한 자동차단기의 시설이다. 운전사의 부주의가 작용할 여지가 없는 시설의 완전성을 바란다.
마지막으로 가장 핵심적인 맹점은 우리들의 무책임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운전사는 35년간 무사고 운전사라 한다. 그런데 가장 초보적인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은 것이 이번 사고의 치명적 원인이다. 그는 목숨을 걸고 일단 멈춤을 했어야 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다. 이번 경우에도 바로 그것이다. 『설마 무슨 일이 있을라구』하는 멋대로의 추측이 자기 책임을 소홀하게 만든다.
교통부도 그렇고 학교측도 그렇고 운전사도 그렇다. 자기 책임은 소홀히 하면서 요행을 바라는 마음, 이건 성숙하지 못한 우리들의 의존적 성격에서 온다. 나 하나의 행동이 몇 사람의, 몇 십명의, 몇 백명의, 아니 몇천만의 인간의 생명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것을 철저히 느낀다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불행은 일어나지 않는다.
전쟁과 굶주림과, 그리고 교통사고와, 그 모든 불행은 하늘이 주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끝으로, 매스컴이 우리들의 이 미숙한 요행심을 조장시키는 무신경에 대해서 항의한다. 이번에 사고 당한 학생들과 같은 반이면서 뒤차를 탔다가 살아남은 학생을 취재하여 기적의 생존이라 하고 기쁨에 넘친 어머니의 사진을 게재한 소위 일류신문의 처사는 지탄받아야 한다. 이런 처사가 우리의 요행심을 조장시킨다. 그게 이 마당에 무슨 취재대상이 되는가.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기쁜 일 슬픈 일이 바로 나 자신의 일로 느낄 만큼 우리는 성숙해져야 한다. 성숙한 사회, 책임 있는 사회만이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다. <이남덕 이대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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