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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해방 전 보통사람 같으면 백화점에 가더라도 미쓰꼬시나 죠오지아와 같은 일본사람이 경영하는 곳으로 갈 터인데 그 보다 규모가 작고 모든 점에 있어서 시설이 빈약한 조선사람의 백화점을 일부로 찾아와서 이른바 「대임의 광영」을 주었다는 데에 영친왕의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영친왕 내외분이 「화신」에 있었던 시간은 불과 30분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로 말미암아 「화신」의 권위는 갑자기 높아졌으며 그때까지 「화신」을 업수히여기던 일본상인들의 「화신」을 보는 눈도 종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져서 「화신」이 민족자본의, 대표적 백화점으로 발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었다.
이에 감격한 화신사장 박흥식씨는 그때의 일을 잊지 않고 항상 영친왕을 고맙게 생각해 오던 중에 전기한 바와 같이 영친왕 내외분이 미국으로부터 동경으로 돌아오는데 비행기표가 없다는 말을 듣자 선뜻 1천여 달러의 돈을 내어 그것을 사보낸 것이었다.
영친왕 내외분이 동경에 귀착한 것은 1960년 8월6일이었는데 전원조포 자택에는 안 계신 동안에 본국으로부터 온 편지가 여러 장 기다리고 있었으며 대개가 4·19혁명이 성취하여 정권이 교체되었으니 하루바삐 돌아오시라는 것이었다.
그 중에도 임시 과도 정부수반 허정씨를 비롯하여 구 황실사무총국장 오재경씨의 <이제는 아무 걱정 마시고 환국하셔서 여생을 조국에서 편안히 지내시옵소서>라는 문면에는 온정이 넘쳐흘러서 영친왕은 해방후 처음으로 본국정부의 따뜻한 말을 듣는 듯 마음에 흡족하였다. 그후 한국에서는 총선거를 치른 후 대통령 윤보선 국무총리 장면씨의 민주당내각이 새로 출현하였는데 바로 그 무렵에 내가 영친왕을 뵈오러 댁으로 갔더니 마침 한국의 새로운 정부를 크게 보도한 일본의 각 신문을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그것을 들여다보고 계시던 영친왕은 『마침 잘 왔소. 본국에서는 이제 정식으로 정부가 수립된 모양인데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소』하고 물으신다.
『글쎄올씨다. 어쨌든 새로운 정부가 섰으니까 전하께서는 우선 축하의 편지라도 한 장내시지요. 』
『그거 참 좋겠군. 그러면 문면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라고 다시 물으신다. 그래서 나는 또 『전하께서는 우리말도 잘 하시고 우리 글도 잘 아시니 한문과 한글을 섞어서 쓰시지요』
그리하여 결국 흰 두루마리에 먹 글씨로 축하의 서한을 쓰시게 되었는데 영친왕의 한문글씨는 어렸을 때부터 이미 정평이 있는 것이어니와 「한글」글씨도 궁체로 잘 쓰시는 데는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축하의 서한은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에게 꼭 같이 내었는데 그 문면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윤보선 대통령각하
이번 새로이 대통령에 취임하신 것을 축하하오며 국보 간난한 이때에 아무쪼록 국태민안의 선정을 베풀어주시기를 앙망 하오며 아울러 각하의 건강을 요축 하나이다.<일구육십년 시월> 동경에서 이근
장면 국무총리각하
오랫동안 고투하신 보람이 있어 이번에 신내각을 조직하시고 그 수반이 되신 것을 충심으로 축하하나이다
8. 15해방은 역사적으로 일대 경사이기는 하오나 38선으로 국토가 양단 되고 민족상잔의 유혈극까지 일어나게 되었으니 남북이 통일되어 평화로운 국가를 이룩하자면 비상한 노력과 고심이 있어야될 줄 아나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각하의 건투를 기원하며 하루빨리 민생을 안정시키시고 통일의 대업을 꼭 성취하시기를 또한 바라마지 않나이다.
이 사람은 멀리 외지에 있어 민주국가창건에 하등의 공헌도 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오나 가까운 장내에 반드시 환국하여 국내 여러분과 기꺼이 만나 뵈올 날이 올 것을 자기하고 있나이다.<일구육십년 시월> 동경에서 이은
그러자 그후 곧 장면 총리로부터 회한이 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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