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영친왕 내외분 환국 10주년기념 음악회

    영친왕 내외분 환국 10주년 기념 음악회가 명휘원 주최로 20일(하오4시·7시) 「드라머·센터」에서 열린다. 「프로그램」은 『도라지』『아리랑』 『치리비리반』 등 합창곡 19곡과 『

    중앙일보

    1973.10.19 00:00

  • (144)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이리하여 영친왕은 위장된「이왕전하」의 칭호를 버리고 다시 영친왕으로 환원하여 떳떳한 한국인으로서 부조의 땅에 묻히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영친왕이 세상을 떠 난지 꼭 반년만인 지난

    중앙일보

    1970.10.24 00:00

  • (143)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영친왕 내외분은 l945년 4월에 은혼식을 거행하였으므로 꼭 4반세기만에 금혼식을 하게된 셈인데 1945년은 태평양전쟁 말기 즉 해방이 되던 해로 동경은 B-29의 공습으로 폐허가

    중앙일보

    1970.10.23 00:00

  • 해방에서 환국까지 |김을한

    순종황후 윤 대비가 승하하신지 1년 뒤인 1967년에는 영친왕의 혼약자였던 만년규수 민갑완 여사가 73세를 일기로 동래 우거에서 별세하였다. 이로써 영친왕과는 가장 인연이 깊고 가

    중앙일보

    1970.10.22 00:00

  • (130)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새로이 구 황실사무총국장에 취임한 이수길씨가 해방후 처음으로 정부의 돈을 가지고 동경에 갔을 때에는 영친왕 내외분은 하와이로 떠날 준비에 한창 바쁜 때였었다. 어째서 갑자기 하와이

    중앙일보

    1970.10.08 00:00

  • (128)해방에서 환국까지|

    해방 전 보통사람 같으면 백화점에 가더라도 미쓰꼬시나 죠오지아와 같은 일본사람이 경영하는 곳으로 갈 터인데 그 보다 규모가 작고 모든 점에 있어서 시설이 빈약한 조선사람의 백화점을

    중앙일보

    1970.10.06 00:00

  • (127)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4·19 혁명당시 필자는 서울에 있었는데 하루는 미국에 계신 영친 왕비로부터 한 장의 편지가 왔다. 내용은 오래간만에「뉴요크」에 와서 아들(구)내외의 신혼생활을 보고 매우 즐거웠다

    중앙일보

    1970.10.05 00:00

  • (126)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오재경씨가 구 황실 재산관리 사무 총 국장으로 있을 때의 차장 이창석씨는 본시 법제처 법제 관으로 오씨가 공보부 장관 시절에는 공보국장으로 오랫동안 함께 일을 해온 사람인데 그도

    중앙일보

    1970.10.03 00:00

  • (125)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이 대통령이 윤 대비의 환궁을 기뻐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모순이 있다. 첫째 과거 10년 동안이나 윤 대비를 정능에 있게 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이 대통령 자신인데 마치 그런

    중앙일보

    1970.10.02 00:00

  • (122)해방에서 환국까지

    영친왕은 마땅히 본국으로 돌아가셔야 될 것이라는 그날의 결정은 안동 부인을 통하여 즉시 영친왕 내외분에게 전달되었는데 그런 일이 있은지 수일 후에 이번에는 방자 부인이 우리들을 초

    중앙일보

    1970.09.29 00:00

  • (121)해방에서 환국까지

    영친왕의 국적을 다시 한국으로 바꾸고 본국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한일 양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선의의 원조를 아끼지 않았거니와 그 중에 우에무라·겐따로오(상촌건태낭)라는 사람이 있다.

    중앙일보

    1970.09.28 00:00

  • 해방에서 환국까지

    평소에 별로 말이 없는 영친왕도 그날만은 이렇게 말씀하였다. 『나는 미나미(남) 총독 때의 창씨제도에도 찬성하지 않았소. 건공(이정공)의 일본귀화에도 반대하였는데 무엇이 좋아서 일

    중앙일보

    1970.09.23 00:00

  • (112)해방에서 환궁까지

    영친왕 내외분이 미국으로부터 일본에 돌아오신 것은 1959년5월이었는데 그 보다도 먼저 영친왕은 3월 16일 밤 뉴요크의 아파트에서 갑자기 쓰러져서 보행도 곤란하게 되었다. 의사가

    중앙일보

    1970.09.21 00:00

  • (114)해방에서 환국까지

    영친왕께 상서를 하고 본국에 와서 알아보아도 패스포드를 얻기는 매우 어렵겠다는 것을 우선 아시게 한 후 꼭 한달만에 동경에 돌아와 보니 영친왕 내외분은 이미 미국으로 떠나신 뒤였다

    중앙일보

    1970.09.17 00:00

  • (110)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오오히라」(대평) 라는 자는 자칭 대평 건설회사의 사장으로 유명한 협잡꾼이었다. 해방 후 혼란한 틈을 타서 영친왕 저에 드나들게 되었는데 전기한 바와 같이 생계비와 세금 등으로

    중앙일보

    1970.09.12 00:00

  • (98)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영친왕비의 말은 계속된다. 당시 주일대표부는 동경에서도 제일 번화한 긴자(은좌)4정 목 핫도리(복부) 빌딩 4층에 있었다. 핫 도리는 본래 유명한 시계 점이었는데 당시로서는 가장

    중앙일보

    1970.08.29 00:00

  • (73) 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그런데 이것도 그때 이우공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영친왕은 동경 왕저 일실에 아무도 모르게 역대 임금의 신위를 모시어 놓고 한식과 추석에는 꼭 다례를 지내고 아들 「구」씨가 여섯

    중앙일보

    1970.07.30 00:00

  • (71) 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1940년 여름- 즉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 해에 동경 「히비야」 (일비곡) 공회당에서는 한성준 일행이 조선의 고전 무용을 공연하여 전문가들의 격찬을 받고 있었다. 한성준씨

    중앙일보

    1970.07.28 00:00

  • 해방에서 환국까지|인간 이은(63)/김을한

    쌓이고 쌓인 10년간의 괴로움 오늘 가시어, 소리 높은 아기 소리 아아 반갑도다. 이것은 둘째 아들 구씨를 낳았을 때 영친왕비가 읊은 화가인데 오래간만에 얻은 아들 구가 무럭무럭

    중앙일보

    1970.07.18 00:00

  • (43)해방에서 환국까지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 3·1운동 직후에 중국에 망명해있던 지사들이 모여서 만든 정부로, 말하자면 해외에서 조국의 독립을위해 싸우는 가장 큰 조직체였다. 초대대통령은 이승만박사였

    중앙일보

    1970.06.25 00:00

  • (35)해방에서 환국까지

    영친왕의 결혼식이 동경에서 거행될 무렵 서울에 계신 순종황제는 매우 섭섭하게 생각하여 일본에서 결혼식이 끝나거든 곧 귀국해서 한국식으로 다시 식을 올리자고 하셨으나 일본 궁내성과

    중앙일보

    1970.06.16 00:00

  • (18) 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이우공이 의친왕 (전 이강공)의 제2공자로 운현궁영선군 (전 이준공) 의 양자로 들어간 것은 전기한 바와 같거니와, 이건공은 의친왕의 제1공자로서 이우공의 생가 형님이 되는 분이다

    중앙일보

    1970.05.27 00:00

  • (6)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환

    어느 해인가 나는 영친왕을 모시고 영화구경을 간 일이 있었다. 그것은 동경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의 하나인「유우라꾸죠」(유악정)에 있는「스바프」좌 (지금은 없어졌다) 라는 양화전문의

    중앙일보

    1970.05.13 00:00

  • (4)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그와 같이 해방 직후에 연합군 최고사령부에서 영친왕을 특별히 잘 보호해준 일이라든지, 1·4후퇴 때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나이 많은 상궁들만 데리고 오도가도 못하게 된 윤

    중앙일보

    1970.05.11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