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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4·19 혁명당시 필자는 서울에 있었는데 하루는 미국에 계신 영친 왕비로부터 한 장의 편지가 왔다.
내용은 오래간만에「뉴요크」에 와서 아들(구)내외의 신혼생활을 보고 매우 즐거웠다는 것과 미국에 온 지도 어느덧 한 달이나 되므로 동경으로 돌아가야 되겠는데 바깥어른의 건강문제도 있고 해서 올 때 모양으로 배로 가기는 차마 어려우니 어떻게「뉴요크」∼동경간의 비행기표를 두 장만 사 보내주면 고맙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편지를 가지고 즉시 중앙청 뒤에 있는 구 황실 재산관리 사무총국으로 가서 먼저 이창석 차장에게 그 사유를 말하고 그 다음 오재경 국장을 만났다. 나의 이야기를 듣고 방자 부인의 편지를 다 읽고 난 오 국장은,『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래서 나는, 『오 국장도 알다시피 영친왕께는 정부에서 오늘날까지 동전 한 푼 협조해 드린 일이 없으니 이번 기회에 구 황실 사무총국의 이름으로 비행기표를 사보내면 좋지 않을까 해서 특히 여기를 찾아온 것이요.』
그랬더니 오 국장은 한참 무엇인가 생각한 후에, 『잘 알았습니다. 구 황실 사무총국의 예산으로 하든지 또는 다른 방법으로 하든지 어쨌든 비행기표는 꼭 사보내겠으니 그것은 나에게 맡겨주십시오』라고 한다. 그 후 오 국장은 약속을 잘 지켜서 미국으로 비행기표를 사보냈으며 영친왕과 방자 부인은 그것을 가지고 그 해 8월6일 동경까지 편안히 오시게 되었던 것이다.
방자 부인으로부터 동경에 무사히 도착하였다는 편지를 받고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려고 오 국장을 찾아가서 치하를 했더니 그는 다음과 같은 뜻밖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구 황실 사무총국의 예산 중에서 비행기 표를 사보내려고 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무절차가 까다로 와서 시일이 오래 걸리겠으므로 생각다 못하여 전부터 잘 아는 화신의 박흥식씨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그분이 선뜻 비행기표 값을 주어서 그것으로 사 보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맙다는 인사는 나보다도 박 사장에게 하시는 것이 마땅할 줄 압니다.』
실상인즉 나는 그때까지 꼭 구 황실 사무총국의 예산으로 사 보낸 것으로 믿고 만시지탄은 있을 망정 잘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개인이 비행기표를 사보냈다고 하니 참으로 의외의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박 사장은 무엇 때문에 그같이 적지 않은 돈을 써가면서 비행기표를 사 보냈나요?』라고 물었더니, 오 국장은『글쎄요. 그것은 나도 같은 모르지만 무슨 까닭인지 박 사장은 해방 전부터 영친왕께는 특별한 관심과 호의가 있었던가 봅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 이유야 어쨌든 나는 항상 박 사장을 고맙게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이 졸고를 쓰느라고 그를 만나 본 결과 비로소 오랫동안의 의문이 풀리게 되었다.
박사장의 말,
『나는 해방 전에 종로에서「화신」백화점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당시 서울에는「미쓰꼬시」, 「히라따」, 「죠오지야」, 「미나까이」등 일본인이 경영하는 백화점은 여러 개가 있었으나 한국인의 것으로는 오직 화신 하나밖에는 없었읍니다.
그리고 그들과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되었는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자금이 풍부한 일본인들과 경쟁을 하자니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었읍니다.
그러던 차에 영친왕(그때는 이왕 전하) 내외분이 동경으로부터 본국에 다니러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이 기회에 어떻게 한번 양 전하를 화신으로 오시게 하는 수가 있다면 크나큰 영광이 될 뿐더러 일본인들의 백화점에 대해서도 큰소리를 칠 수가 있을 것 같아서 이왕직에 여러번 탄원하였으나『왕 전하를 백화점으로 가시게 할 수는 없다』고 하여 그 계획은 부득이 단념할 수밖에 없었는데 누구에게서 그이야기를 들으셨는지 1933년8월6일 갑자기 영친왕내외분이 일부러 화신을 참관해주셔서 크게 면목을 떨친 일이 있읍니다. 그러니까 아마 그때의 영친왕의 생각으로는 한국인이 처음으로 경영하는 백화점을 당신내외분이 잠깐 가봄으로써 조금이라도 도와주자는 거룩한 뜻에서 나온 것이겠지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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