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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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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리하여 영친왕은 위장된「이왕전하」의 칭호를 버리고 다시 영친왕으로 환원하여 떳떳한 한국인으로서 부조의 땅에 묻히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영친왕이 세상을 떠 난지 꼭 반년만인 지난 23일에는 고종황제의 마지막 후궁인 삼축당 김옥경 여사(80)가 뇌출혈로 별세하여 구 황실과 인연 깊던 사람이 또 한사람 줄게 되었다.
삼축당 김씨는 8세 때 내인으로 경복궁에 들어가서 21세 때에 환갑을 맞이한 고종의 후궁이 되었으며 1919년 삼·일 운동 직전에 고종이 승하하자 순종은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서 당시 덕수궁에 있던, 역시 고종의 후궁인 광화당 이완덕 여사(67년11월10일 별세)를 위해서 사간동에 집을 지어주고 김씨에게는 삼축당이라는 당호까지 지어 주었다.
당호라는 것은 본래 임금이 가까이 한 여인이 아이를 낳아야만 하사를 하는 것인데 삼축당 김씨는 아이를 낳지 않고도 당호를 받았으니 이는 효성이 지극했던 순종의 거룩한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 두 부인도 비록 윤 대비만큼은 못하다고 할지라도 영친왕을 몹시 고대한 사람 중의 하나였는데 그들도 역시 말 한마디 주고받지 못하였으니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영친왕이 환국한지 6년 반 동안에 윤 대비를 비롯하여 광화당·삼축당 그리고 민갑완 여사까지 넣으면 전후 네 분의 여성이 세상을 떠났고, 고종황제의 자녀로는 오직 덕혜옹주 한 분이 지금 남아있는 셈이다.
영친왕은 해방 전부터 조국을 위하는 길은 무엇보다도 인재양성에 있다고 생각하여 특히 교육사업에 크나 큰 관심을 가졌었으니 태평양전쟁 당시에 일본에 있는 남자 유학생을 위해서는「이화회」를, 여자 유학생을 위해서는 홍희료를 만들어서 각각 학비를 도와주고 기숙할 집을 마련해 준 것도 모두 그러한 뜻에서였다. 그리하여 영친왕은 해방이 되자 <언젠가 조국에 돌아가게 되면 옛날의 왕가 토지를 조금이라도 분양 받아서 그 일부로 농촌청년을 위한「연구농장」을 건설해서 다소나마 민중을 위하여 알하고 싶다>고 하였고, 방자 부인은<나는 불행한 아이들을 위해서 힘이 되고 무엇이고 사회에 남을만한 일을 하고 싶다>고 두 분이 마주 앉기만 하면 그러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것이다.
영친왕이 발병하기 전에 어느 날 동경에 있는 전원조포 댁으로 갔더니 본국에 남아있는 구 왕실 재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였다.
①종묘는 창덕궁 북방, 고지산 기슭에 적당한 기지를 정해서 김용진(구룡산인-구 왕가의 척신으로 문인화의 대가, 지금은 고인)을 위시하여 친척들이 의논해서 재건토록 할 것.
②칠궁은 개조해서 그 일부에 덕혜옹주를 살게하고, 나머지 토지는 진명에 기부를 하고 싶다.
(3)영휘원은 숙명에 기부하고 그 일부에「이은 소유지」를 남겨서 장래 거주할 집을 짓고 나머지는 양정이 사용하도록 한다.
④사동궁 (의친왕)의 주거는 서울시내에 있는 임대한 소유지를 정리해서 그 중에서 분양한다.
이상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필자에게도 장래 협력할 것을 당부하시었다.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숙명·진명·양정 등 세 남녀 학교와 숙대는 구 왕실에서 건립한 교육기관이므로 영친왕 내외분이 특히 그 여러 학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무엇이고 도우려고 한 것은 또한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구 왕가에서 무엇이고 직접 민중에게 혜택을 준 일이었다고 하면 전기 교육기관밖에는 없으므로 영친왕의 어머님 엄비가 자기 재산을 제공해서 양정·숙명·진명의 세 학교를 건립케 한 것은 가장 현명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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