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해방에서 환국까지

영친왕께 상서를 하고 본국에 와서 알아보아도 패스포드를 얻기는 매우 어렵겠다는 것을 우선 아시게 한 후 꼭 한달만에 동경에 돌아와 보니 영친왕 내외분은 이미 미국으로 떠나신 뒤였다.
전원조포 댁에는 노파 한 사람이 집을 지킬 뿐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해서 떠나셨느냐는 것을 물어본대도 소용이 없겠으므로 나는 바로 궁내청으로 가서 우사미·다까지(우좌미의)장관을 만나기로 하였었다. 우사미궁내청장관은 사내총독 때 초대 내무국장을 지낸 우사미·가쓰오(우좌미승부)씨의 둘째아들로 인격이 중후한 신사였다. 첫 인사가 끝난 뒤에 영친왕 내외분의 이야기를 하게되자 그는 내가 채 묻기도 전에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영친왕 내외분이 오셔서 미국에 있는 아드님 구씨의 졸업식에 가시겠다고 패스포드를 해내라고 조르시는데는 정말 땀을 뺐읍니다. 그때 양 전하의 말씀은 한국정부에서 패스포드를 아니 내주니 그 대신 궁내청에서 일본 패스포드라도 마련해 달라시는 것인데 패스포드를 일본 것으로 낸다는 것은 즉 국적을 일본으로 고친다는 것으로 일은 매우 중대하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말을 멈추었던 우사미씨는 당시의 광경을 회상하면서,
『비록 일본이 전쟁에 패해서 공적으로는 관계가 없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로서야 어찌 양 전하의 편의를 보아 드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패스포드를 일본 것으로 내신다는 것은 일본에 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 참으로 중대한 일이오니 아무리 아드님이 보고 싶으시더라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라고 여쭈었더니 왕전하는 아무 말씀도 없었으나 비전하는 『나도 일본사람인데 그거야 상관 있소. 어쨌든 졸업식에 늦지 않게 여권이나 속히 만들어주오』라고 하시므로 궁내청에서도 어쩔 수 없이 외무성에 말해서 패스포드를 얻어 드린 것입니다.
우사미 장관의 말을 듣고 나는 비로소 혹시나 하는 나의 의문이 그대로 들어맞은 것을 알게 되었다. 우사미씨의 말이 아니라도 일은 매우 중대하였다. 아드님 졸업식에 참가하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일본국민이 되시다니…나는 야속한 생각과 함께 영친왕을 그와 같은 궁지에 몰아넣는 경무대의 처사가 원망스러웠다.
그후 미국에서의 경과를 방자부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보스턴역두에 선 구. 훌륭하게 성장한 우리 아들. 이것이 그 어리기만 했던 저 구인가? 나의 눈시울은 짜릿해 오고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눈물이 많은 바깥어른도 구의 손을 쥔 채 가슴의 감동을 억제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리하여 6월7일 구가 사회로 처음 출발하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백년의 역사를 가진 학교인 만큼 세계각국으로부터 모인 유학생이 많았고 키가 큰 학생들 틈에 조그마하면서도 늠름하고 침착한 구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에는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졸업식전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어 한사람 한사람 검은 각모의 털을 오른쪽에 드리우고 총장 앞에 나아가 졸업증서를 받자 이번에는 그 털을 왼쪽으로 고치고 조용히 단을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차례가 돌아온 구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한국왕의 정계로 태어나 서민으로서 학습원을 마치고 다시 민주주의의 본고장에서 7년간 공부하여 이제 그 결실을 보아 이날로부터는 하나의 사회인으로서 출발하는 운명적인 그 모습에 나는 아무쪼록 앞날의 거센 세파를 곧장 힘차게 뚫고 나아가게 해주소서하고 하느님께 빌었던 것입니다.
10월부터는 뉴요크 교외 화이트·플레인이라는 한적한 주택지 아파트에서 우리 세 식구만의 조촐한 생활이 시작되었읍니다.
구는 아침 일찍 뉴요크 맨해턴에 있는 I·M·PEI·에이전시 건축사무소에 통근하고 우리들은 시내구경 혹은 극장구경을 가고, 금요일과 토요일은 근처 슈퍼·마키트로 1주일 분의 식량을 사러 나가기도 하고 혹은 아파트에서 독서도 하고 근처 중학교 야학에 나가 영어공부도 하는 등 한가하고 안락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면서부터 오늘날까지 세탁 같은 것은 좀 채 해본 일이 없었읍니다만 이제 전화된 아파트 세탁장에서 자기 아들의 속옷을 빨아다 널고 그것을 또 전기다리미로 다리는 등 나는 일반사회의 어머니의 구실을 하는 것 같아 그윽한 행복감에 싸이는 것이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