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1970.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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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우공이 의친왕 (전 이강공)의 제2공자로 운현궁영선군 (전 이준공) 의 양자로 들어간 것은 전기한 바와 같거니와, 이건공은 의친왕의 제1공자로서 이우공의 생가 형님이 되는 분이다. 이우공과 마찬가지로 역시 일본으로 끌려가서 육군 사관 학교와 육군 대학을 마친 후 해방 직전에는 기병 중좌로 있었다.
모든 조건이 아우와 비슷했건만, 다만 한가지 다른 것은 이우공은 사사건건 일제에 항거하였건만, 이건공은 마음이 약한 탓인지 무엇이고 일제가 하라는 대로 순종하였으며 결혼 문제에 있어서도 아우와는 달리 일본 궁내성에서 지시하는 대로 일본 화족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던 것이다.
해방전의 일인데, 필자가 제일선 기자로 있을 때 하루는 이왕직이 있는 창덕궁에 들어갔더니, 그때 회계 과장으로 있던 사또 (좌등)라는 일본인 사무관이 『이건공은 온화한 분이라 별문제가 없지만, 이우공은 측근자의 말을 도무지 듣지 않아서 곤란하다』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들이 좋지 않게 말하는 것은, 즉 그만큼 영특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이우공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만만찮은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랬던지, 당시 들리는 말로는 무엇을 사려고 백화점 같은데 갔을 때, 이건공은 따라 온 사무관에게 일일이 물어보고 물건을 사는데 반하여 이우공은 무엇이고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이것을 다오』『저것을 다오』라고 손가락질을 해서 산더미같이 물건을 사므로 혹 수행했던 사무관이 『암만 나중에 지불하는 외상이라 할지라도 너무 많지 않습니까?』라고 할 것 같으면 이우공은 얼굴에 노기를 띠고 『내 돈 가지고 내가 사는데 네가 무슨 장관이냐?』고 꾸짖어서 사무관이 무안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건공비가 된 일녀는 「히로하시」(광교) 백작의 딸 「세이꼬」(성자)로서 여러 남매의 자녀까지 두었건만, 8·15 해방이 되어서 지위도 재산도 없어지자 남편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동경 은좌에서 「모모야마」 (도산) 라는 「바」 (주점) 의 마담이 되어 일시는 일본 사회의 큰 이야깃거리가 되었었다. 그리하여 「거리로 뛰어나온 공비」이니, 「사양의 왕가」 니 하여 각 신문과 잡지에 크게 보도되었던 것이다.
패전 후 일본의 황족과 귀족들은 갑자기 변한 시대 풍조에 순응하지를 못하여 몰락하는 가정이 많았고, 그들도 인간이므로 여러 가지 불미한 사건도 적지 않았지만, 이건공 내외만큼 일본 매스컴에 많이 등장한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니, 그 때문에 『실과 망신은 모과가 시키고 이왕 가와 망신은 이건공이 시킨다』는 말까지 있었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필자가 동경에 있을 때 가장 창피스럽고 곤란했던 일은 보통 일본 사람들이 「이왕 전하」와 「이건공」을 혼동해서 말하는 것이었다. 「이건공과 그 부인」의 이야기가 신문이나 주간 잡지에 커다랗게 보도된 다음날에는 누군가로부터 번번이 질문을 받는데, 그것은 거의 모두가 「이건공」을 「영친왕」으로 잘못 알고 하는 질문이었다. 일레를 들면 『이왕 전하도 큰 탈났읍디다 그려.』『왜, 이혼을 했나요?』『무슨「스캔들」이 있었나요?』『그러나 이 왕비는 꽤 미인입디다.』
식으로 자꾸 말을 붙이므로 그럴 때마다 나는 이왕 가의 계보를 설명하기에 땀을 흘렸는데 한국 왕실의 「이모전하」라고 하면 으례 영친왕으로 짐작하는 그들에게는 좀처럼 납득이 아니 가는 모양이었다. 그런 문답이 오갈 때의 창피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는데 아무 상관도 없는 필자가 그랬을 진대, 정작 영친왕이야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또 마음이 쓰라렸으랴?
어느 날 오후, 나는 「덴엔조오후」(전원조포)에 있는 왕 전하 댁엘 갔더니, 영친왕 내외분은 안 계시고 웬 중년의 일본 부인이 한사람, 그녀의 아들인 듯한 어린아이와 함께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당시 영친왕 댁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보던 「이나바」(도섭)라는 여 비서에게 물어보니, 그 여자가 바로 이건공의 새로 얻은 부인인데 전력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가끔 와서 돈을 뜯어가며, 간혹 돈이 없어서 주지를 못하는 때에는 『그래 왕 전하라고 하면서 조카도 못 봐 주느냐?』고 함부로 대어 들어서, 그 여자만 나타나면 왕전하 내외분은 딱 질색이며, 그날도 그 여자 때문에 밖에서 일부러 돌아오시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평생 남에게서 시달림을 받아본 일이 없는 영친왕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겠으나 그렇다고 내 집을 비어두고 밤 낮 밖으로 피해만 다닐 수도 없지 않은가? 나는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며 『왕 전하는 너무 마음이 약하시다』고 혼자서 탄식하였다.
이건공은 일본에 귀화한 채 지금도 홀로 동경에 남아있는데 일시 취득했던 일본 국적을 내버리고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서 부조의 땅에 묻히게된 영친왕으로서는 최후까지 조카 이건공의 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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