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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영친왕의 국적을 다시 한국으로 바꾸고 본국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한일 양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선의의 원조를 아끼지 않았거니와 그 중에 우에무라·겐따로오(상촌건태낭)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본시 내무성 관료였으나 식견과 교양이 높은 신사로 얼마 전까지 일본 도로 공단 총재로 있었으며 현재 한일 협력 위원회의 간부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에무라씨는 그다지 큰 재산도 없으면서 자기가 고문으로 있는 어떤 회사에서 매월 들어오는 고문료를 받지 않고 『나는 그 돈이 아니라도 살수가 있으니 영친왕 댁으로 직접 보내 드리라』고 하여 여러해 동안 영친왕을 도와 드린 일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조선은행 주권에서 생긴 전기 1천만원으로 밀린 세금을 낼 때에는 일부러 세무서를 찾아가서 『아무리 세상이 변했기로서니 세금이 체납됐다고 해서 이왕 전하의 세간살이를 차압할 수가 있는가? 이것은 우리들 일본인 전체의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하여 세금을 훨씬 탕감케 하고 즉시 차압을 해제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의 호의와 노력으로 우선 발등의 불만은 끄게 되었으나 가장 중요한 국적 개정이나 앞으로의 생활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일본 천황을 위시해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원조를 받는다는 것은 그것이 비록 선의에서 나온 자발적 행위라고 하더라도 영친왕으로서는 결코 명예스러운 일이 못 되므로 영친왕이 영친왕으로서의 명예를 보존하는 길은 오직 하루 바삐 환국해서 국적을 도로 찾는 것이요, 그렇게 되면 생계비도 자연 해결이 되리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건만 영친왕비 방자 여사는 경무대의 너무나 가혹한 처사에 분개하고 전도를 비관한 나머지 동경에다 가족 묘지까지 설정하고 일본에서 영주할 채비를 차리니 영친왕의 본심과는 반대로 일은 자꾸만 비뚤어져 갈 뿐이었다.
『영친왕이 이왕전하라 해서 일반의 존경을 받는 것은 구한국의 황태자라고 하여 그러는 것이지 일개 일본인 이씨라고 하면 일본에 얼마든지 있는데 누가 존경을 한단 말인가? 따라서 영친왕은 어디까지나 한국의 영친왕으로서 위엄을 보존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제는 아무 관계가 없이 된 일본을 떠나서 속히 귀국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의 일본인 이은씨가 아니라 구한국 최후의 황태자로서 최고의 명예를 가지고 인연 깊은 조국에서 생애를 마치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라는 생각에서 전기 기미시마(군도일낭) 우에무라씨를 위시하여 영목일씨(초대 출입국 관리나 장관으로 현 일한 친선 회장) 수적진륙낭씨(전 조선 총독부 식산국장) 등 영친왕의 장래를 가장 걱정하는 사람들이 동경 히비야(일비곡)에 있는 산수누라는 요정에 모여 그 대책을 협의한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는 영친왕비를 대신하여 안도오(안동화기자) 부인도 참석했는데 안도오 부인은 그 부친이 과거 방자 부인의 친정인 이본궁가의 시종으로 있었던 일이 있었고 그녀 자신도 방자 부인과는 학습원의 동창일 뿐더러 그 남편 안동정웅 중장은 영친왕과 육군 사관 학교 시대의 동기생이었던 관계로 부부가 다함께 영친왕 내외분의 일이라면 무엇이고 잘 보아 드리는 사람들이었다. 1958년께라고 생각되는데 점심을 나누면서 군도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문을 듣자니 이왕비께서는 전도를 비관하시고 일본에 영주할 결심을 하신 모양인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일은 매우 중대하며 우리들 뜻이 있는 일본인으로는 찬성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방자비는 일본의 황족으로서 한국 왕실에 시집을 가셨으므로 그 출신이야 어쨌든 엄연한 한국의 왕비이시므로, 어디까지나 한국 왕실과 이왕 전하의 명예를 중심으로 생각을 하셔야 될터인데 이승만 대통령의 처사가 나쁘다고 해서 일시적 감정으로 대사를 그르치면 아니 되므로 비전하께서는 일본에서 영주할 생각을 버리시고 왕 전하를 모시고 본국에서 여생을 보내도록 하시는 것이 상책일 줄 압니다….』
그리고 그는 만일 이대로 영친왕이 일본에 계시다면 날이 갈수록 지내시기가 더욱 어렵게 되어 종말에는 체면조차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실 것이라는 것을 되풀이해서 역설하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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