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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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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영친왕 내외분은 l945년 4월에 은혼식을 거행하였으므로 꼭 4반세기만에 금혼식을 하게된 셈인데 1945년은 태평양전쟁 말기 즉 해방이 되던 해로 동경은 B-29의 공습으로 폐허가 되어 영친왕 내외분은 방공호를 들락날락하면서 간소한 은혼식을 거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 금혼식을 하게되었으니 얼마나 기꺼운 일이랴? 영친 왕비 방자 여사는 실로 감개가 무량하였다. 그렇건만 영친왕은 그것도 모르고 다만 병상에 누워있을 뿐이었는데 금혼식 4일 후인 1970년 5월 1일 갑자기 용태가 악화하여 필경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영친왕은 이날 정오 자기가 위독하다는 급보를 받고 달려온 부인 방자 여사, 아들 구씨 내외, 주치의 김학중 박사 등 측근자에게 둘러 싸여서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린 고통과는 달리 아무런 괴로움도 없이 마치 잠을 자듯 고요히 눈을 감았다.
생각하면 파란이 중첩한 일생이었다. 이 왕조 최후의 황태자로 태어나서 70 평생을 한번 마음껏 웃어 보지도 못하였으니, 얼마나 가엾은 인생이냐?
영친왕이 나 어린 왕세자의 몸으로 처음 일본으로 끌려갈 때에 아버님 고종은『너, 일본에 가거든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나 아예 얼굴에 나타내지를 말고 조심하라』고 타일렀다. 그 때문인지 영친왕은 아예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최후의 숨을 거둘 때에도 유언 한마디 없었으니 영친왕이야말로 고독의 왕자요, 침묵의 왕자였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이상한 것은 영친왕을 비롯하여 윤 대비나 민규수 (갑완 여사)가 다함께 73세를 1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물론 우연의 일치이긴 하겠으나 어쩐지 신비스러운 느낌을 금 할 수 없다.
영친왕의 장의는 5월 9일에 거행되었는데 그날 아침 7시에는 빈전이 있는 낙선재에서 가톨릭의 미사가 있었고 불교도들도 따로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곧 이어서 창덕궁 대조전 앞뜰에서 거행된 영결식에는 3백여명의 국내외 조객이 모인 가운데 상주 구씨와 방자 여사의 분향이 있었고 삼부 대표와 외교 사절단, 그리고 일반 조객이 그 뒤를 따랐는데 특히 일본으로부터는 천황 사절로 「질부궁비」와 「고송궁」부처가 참례하여 이채를 띠었었다.
이윽고 영친왕의 자실은 빈소를 떠나 대거에 옮겨졌다. 관은 「의민 황태자 지 자실」이라고 명정을 앞세우고 진명 여고생 20명이 펼쳐든 태극기와 양정 고교생이든 수많은 만장을 들고 돈화문을 나와 만년 유택이 될 금곡 영원으로 향하였다.
이날 연도에는 수십만 군중이 나와서 영친왕의 마지막 길을 전송하였는데 새끼줄을 친 연도에는 앉고 선 사람이 빽빽하게 늘어섰고 옥상과 창문에도 인파가 구름처럼 밀렸다. 그리하여 나이 많은 사람들은 『영친왕 마저 가신다』고 눈물지었다.
영친왕의 자실은 영원의 임시 빈소에서 의장 대원의 손에 들려 미리 마련된 현실에 조용히 안치되었다. 그리하여 영친왕의 유해는 아버님 고종 황제가 묻히신 금곡 왕릉에서 영원히 잠들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날 낙선재 뒤 수강재에서 기거하고 있는 덕혜 옹주는 영친왕의 별세 소식을 듣고도 무슨 이야기인지 잘 알아듣지를 못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자아내게 했고 일본 황실의 이리에(입강자정) 시종은 『일본 천황·황후 양 폐하께서는 이은 전하의 서거 소식을 듣고 깊이 애도하시고 조의를 표합니다』라고 전해왔다.
이리하여 비련의 황태자 영친왕 이은씨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인연 깊은 창덕궁 낙선재에서 최후의 숨을 거두고 조국의 땅에 그 뼈를 묻게 되었다.
한가지 유감 된 일은 좀더 일찌기 돌아와서 단 하루라도 조국 강산을 바라보고 윤 대비께도 문안을 드렸었으면 하나 그 대신 한때는 일본 사람이 되었던 국적을 도로 찾고 그리운 조국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가신 것은 그야말로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것이다.
영친왕의 장의가 거행되던 날 어떤 방송국 아나운선가 『오늘은 전 황태자 영친왕 이은씨의 장의 날 입니다. 이조 5백년의 마지막 황태자로 태어난 때문에 온갖 풍상과 고초를 겪다가 향년 73세를 1기로 세상을 떠난 영친왕, 그분의 생애는 구 황실의 비극을 그대로 상징하는 듯 고독과 인종의 일생이었읍니다…』라고 부르짖던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춘초는 연년록인데 왕손은 귀불귀라는 말이 있다. 내년 봄 아니, 내 후년 봄에도 창덕궁 앞뜰에는 춘초가 무르녹으련만 영친왕은 돌아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얼마나 섭섭한 일이랴? 이로써 구 왕실 최후의 황태자 이은씨는 만고의 한을 품은 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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