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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940년 여름- 즉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 해에 동경 「히비야」 (일비곡) 공회당에서는 한성준 일행이 조선의 고전 무용을 공연하여 전문가들의 격찬을 받고 있었다.
한성준씨는 충남 홍성 사람으로 당대 유일한 명고수 (북잡이) 요, 또 명무용가였는데 총독부의 억압으로 장차 없어질지도 모르는 조선 고유의 민족 예술을 일본 본토에서 한번 과시해 보려는 생각에서 일부러 동경으로 간 것이었다.
당시 일본 「가부기」 (가무기=구극)의 중진이며 역시 무용가로 유명한 「이찌까와·엔노스께」 (시천원지조)는 그때의 공연을 보고 다음과 같은 감상담을 「아사히」(조일) 신문에 내었었다.
『조선 고전 무용의 대가로 유일한 생존자라는 한성준 노가 동경에와서 무용회를 개최한 것은 여러 가지 점으로 자못 뜻깊은 일로서 나도 가서 보았는데 얻은 바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성준 노가 직접 추는 「신선의 춤」과 「학 춤」등은 참으로 훌륭한 것이어서 아주 행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추는 「하인의 춤」의 유머와 「풍년의 춤」의 향토적 야취가 가득한 점은 흥미가 진진 하였습니다.
승무는 역사가 오래된 것인 만큼 언제 보아도 아름답고 또 가장 알기 쉬운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한성준씨의 춤은 조금도 빈틈이 없는 훌륭한 무용으로 전체의 움직임이 아름다운 고전을 계승한 테크닉 (수법)은 참으로 고귀한 예술이었습니다. 그리고 반주의 조선 음악도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할 것도 없이 한성준씨 뿐만 아니라 어떤 기성 춤을 보존해 나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조선의 고전 무용은 마땅히 영구하게 보존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기사는 영친왕 내외분도 읽었었다. 꼭 그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 얼마 전에 숙명 여고생들의 대상으로 뜻하지 않은 눈물을 보이게 되고 그에 따라 새삼스러이 민족 문제라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땀이라 영친왕은 불현듯 「히비야」 공회당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조선 무용을 보러 가지 않으려오.』
영친왕이 이렇게 말씀하니 방자 부인도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도 그것을 보고 싶었어요.」 영친왕은 자못 만족한 표정으로 『이제부터는 그런 것을 되도록 많이 보도록 합시다. 그러나 사무관들에게는 알리지 않는 것이 좋을 거요.』
『나도 아무도 모르게 사사로이 가는 것이 재미있어요.』
그리하여 운전사에게만 귀뜸을 해서 두 분은 일비곡 공회당으로 갔다. 운전사가 먼저 공회당 사무실로 들어가서 표를 사온 것이며, 지배인이 문 앞까지 마중 나오겠다는 것을 비공식이니 제발 그러지 말라고 간신히 제지하였다.
일비곡 공회당 1등석 한 모퉁이에 자리잡은 영친왕은 뚫어질듯이 정면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성준의 무용은 과연 명수였고 젊은 여성들의 춤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보다도 갓을 쓴 옛 모습의 세 악사가 퉁소를 불고 깡깡이 (깡겡이)를 켜고, 장구를 치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 거기서 풍기는 애련한 음악 소리를 듣고 있으면 고향으로부터 누군가가 부르는 듯 마음이 저절로 처량해 졌다.
영친왕은 그 옛날 덕수궁에서 들은 듯한 그 음색에 도취되어 말없이 옆에 있는 방자 부인을 보니 부인도 역시 애련한 표정으로 영친왕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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