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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해방에서 환궁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영친왕 내외분이 미국으로부터 일본에 돌아오신 것은 1959년5월이었는데 그 보다도 먼저 영친왕은 3월 16일 밤 뉴요크의 아파트에서 갑자기 쓰러져서 보행도 곤란하게 되었다. 의사가 와서 진단한 결과 뇌혈전의 증상이라고 하여 한때는 어떻게 될지 몹시 염려되었으나 다행히 4월말께는 바른편 다리를 조금 끌 뿐 보행을 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겨우 무사히 동경으로 돌아오게 된 것인데 이것이 영친왕으로 하여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중병에 걸리는 첫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영친왕 내외분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전원주포 댁으로 심방 하였더니 영친왕은 안락의자에 반쯤 누워서 텔리비전의 스모오(일본씨름)를 보고 있다가 필자가 들어가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시며 반가이 맞아주신다. 그리고 최초에 묻는 말씀은 역시 『대비마마는 안녕하시냐?』였고, 윤 대비께서는 경무대에서 허락을 하지 않아 아직도 낙선재로 못 들어가고 그대로 정릉에 계시다고 여쭈었더니 갑자기 안색이 변해지며 우울해 하시었다.
이윽고 필자는 그동안 본국에서의 일을 보고하는 가운데 『이기붕씨나 변영태씨와 같은 이에게 이야기를 해도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잘 이해를 하면서도 경무대에는 감히 말을 못하는 것을 보니 이 대통령의 전하(영친왕)께 대한 오해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닌 듯 합니다. 그래서 저는(필자) 대통령은 만날 생각도 않고 그대로 돌아오고 말았읍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일본의 패스포트로 미국에 가셨던 모양인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그렀소.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다가 급기야 편지를 받고 보니 본국에서도 여권을 얻을 가망이 없다고 하므로 생각다 못해서 궁내청 장관에게 부탁하여 여권을 얻은 것이오』라고 아주 태연히 말씀하신다. 여기서 필자는 다시,
『미국에 가신 것은 잘되었읍니다만 패스포트를 일본 것으로 하신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일본의 패스포트는 일본국민이라야 내어 주는 법이므로 이번 일로 말미암아 전하는 일본에 귀화한 것이 되고 그에 따라 국적도 일본으로 넣어가고 말았으니 일은 참으로 중대합니다.』
영친왕은 약간 당황한 빛으로 『그야 나도 아주 짐작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본국 정부의 처사가 너무나 냉담하고 미국에는 가야겠으므로 어쩔 수 없이 궁여일책으로 그렇게 한 것이오』라고 하시며 고개를 수그리신다. 여기서 필자는 또 주제넘은 말씀을 올렸다. 『대단히 황송한 말씀이오나 한양조(이조) 5백여년의 역사를 볼 것 같으면 제28대 왕조 가운데에는 아들이 없어서 양자를 하여 대통을 이은 일이 많은바 우선 전하의 부왕 되시는 고종황제도 운현궁에서 양자로 들어가서 임금이 되셨고 그 윗대인 철종 황제도 강화도에서 입승 대통을 하신 것인 바 전하의 대에 와서 외국에 귀화하여 일본국민이 되신다면 열성조에 대해서 무슨 면목으로 대하시겠습니까? 저와 같은 한 서민으로도 그렇게는 못하겠거늘 더구나 전하께서야 어떻게 그런 실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미 돌아가신 조상도 조상이려니와 지금 살아있는 일반 민중 가운데에는 아직도 전하를 동정하고 전하께 대해서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사람이 많은데 첫째 그 사람들을 실망케 해서는 아니 될 줄 아옵니다….』
그리고 필자는 그 얼마 전 본국에 갔을 때 일반 민중이 구 왕실이라고 하면 공연히 겁을 집어먹고 이야기조차 크게 못하는데에 의분을 느끼고 지금은 없어진 연합신문에 해방 후 처음으로 구 왕실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영친왕의 근황을 10여일 동안이나 연재하였던 바 신문이 불티같이 잘 팔려서 가판 붓수가 격증하여 신문사 사람들을 놀라게 한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일반민중이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구 왕실에 대해서 깊은 관심과 궁금증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점을 들어서 필자는 『그러므로 경무대의 처사야 어쨌든 일반민중의 소박한 감정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도 이번 일은 참으로 유감된 일입니다. 만일 국내민중이 전하께서 일본에 귀화하신 것을 안다면 얼마나 섭섭하게 생각하겠읍니까?』영친왕의 표정은 더욱 침통해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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