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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그런데 이것도 그때 이우공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영친왕은 동경 왕저 일실에 아무도 모르게 역대 임금의 신위를 모시어 놓고 한식과 추석에는 꼭 다례를 지내고 아들 「구」씨가 여섯 살 때부터 벌써 다례 지낼 때에 술 따르는 방법을 가리켜 주었다고 한다.
그것은 1937년 소위 「지나 사변」후에 당시 이 왕직에서 과장으로 있던 이겸성으로 하여금 글씨를 잘 쓰는 남봉우라는 사람을 시켜 종묘에 모신 81위의 위패를 베껴 간 것이라는 바 그때 영친왕의 생각으로는 전쟁이 점점 확대되어 본국에 귀성하지 못 하더라도 종묘의 제사만은 꼭 당신이 지내야겠다는 마음에서 동경 왕저 일실에다 제2의 종묘를 마련해 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뿐 아니라 영친왕 내외분은 『민족의 장래는 오직 청년들에게 달려다』는 생각에서 인재 양성의 필요를 느끼고 남학생을 위해서는 「이화회」를, 여학생을 위해서는 「홍희회」를 만들어서 다 각기 일본 유학 중의 본국 학생들을 도와주었다고 하니 이것은 그러한 처지와 환경에 있는 사람으로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오래간만에 본국에 돌아온 이우공은 되도록이면 다시 일본에 가지 않으려고 히로시마 (광도) 서부군관구 사령부의 고급 참모로 전근 명령을 받고서도 이 핑계 저 핑계로 부임을 천연하고 있었는데 성화같은 일본 군부의 명령으로 히로시마로 가서 필경 원자 폭탄의 세례를 받게 되니 이우공비 박찬주 여사의 비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친왕 내외분의 충격도 이만 저만 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감회를 방자 여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전하는 제일 항공군사령관으로 계셨으므로 비행기로 시찰 여행을 하시는 일이 많았고 군대의 일이라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도 예정을 변경 할 수가 없는 때도 많았으므로 『혹시나』하고 입밖에 내지는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한잠도 자지를 못하고 오직 무사하시기만 기원하는 날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 전하는 마땅히 아무 일도 없으셨으나 천만 뜻밖에도 젊은 이우공이 원자 폭탄 때문에 세상을 떠난 것은 여간 큰 충격이 아니었습니다.
그해 7월16일에 북지태원에서 돌아온 이우공이 이제부터 히로시마로 가는 편이라고 인사를 하러 왔을 때에는 풍채도 당당한 청년 장교였는데 그 사람이 원자탄에 맞아 벌써 죽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동경도 이제부터는 공습이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작은 아버님, 작은 어머님께서도 아무쪼록 조심하시와 그저 무사하시기만 기원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던 이우공이 그후 채 한 달도 못되어 먼저 세상을 떠나다니 사람의 운명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전해 여름 나는 이우공비와 함께 황후 폐하의 대리로 북해도에 농촌 부녀들의 근로 봉사를 시찰차 파견 된 일이 있었는데 어느날 밤 여관에서 이우공비가 『이 전쟁이 어떻게 되든 가에 모두가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살아남아야 되겠습니다…』라고 말하던 일이 생각나서 젊고 아름답고 그리고 또 영악한 이우공비가 몹시 가엾게 생각되었습니다.
나는 비상한 충격과 함께 그러한 일들을 회상하고 있었는데 조선의 왕공족이라고 하면, 우리 집과 건공·우공 형제의 세 집뿐이므로 그 중의 일각이 무너진 것이며 그 중에도 가장 젊고 총명하여 누구보다도 제일 믿고 의지하던 우공이 죽었으니 왕 전하의 마음이야 또 얼마나 슬프고 아프셨겠습니까? 그것은 옆에서도 차마 뵈올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우공의 죽음은 또 서울에 계신 아버님 의친왕 내외분은 물론 미망인 박찬주 여사와 그리고 나 어린 아들「청」「종」의 두 형제를 무한히 슬프게 하였을 것이니 이우공이 세계에서 맨 처음으로 원자 폭탄에 희생이 되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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