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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어느 해인가 나는 영친왕을 모시고 영화구경을 간 일이 있었다. 그것은 동경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의 하나인「유우라꾸죠」(유악정)에 있는「스바프」좌 (지금은 없어졌다) 라는 양화전문의 고급 영화관인데 때마침『지프차의 4인』이라는 미국 영화를 상영중이기에 특히 영친왕 내외분을 초대한 것이었다.
『지프차의 4인』이라는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후「오스트리아」의 수도「빈」을 연합군이 점령하여 미-영-불-소의 네 나라가 공동관리를 할 때의 희비극을 그린 작품으로,『지프차의 4인』이라는 뜻은 미국과 영국과「프랑스」와 소련등 네 나라의 헌병이 날마다 함께 「지프」를 타고「빈」시내를「퍼트롤」(순찰) 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가지가지 이야기를 엮은 것이므로 결국 영화의 이름도 그 같이 붙인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독-이 양국과 일본을 쳐부수기 위해서 미-영-불 3국이 소련과 동맹관계를 맺었고 소련은 그 덕분에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물자와 원조를 얻어서 거의「스탈린·그라드」까지 쳐들어온「히틀러」의 독일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전쟁이, 승리로 끝나자마자 음흉한 소련은 금세 그 본성을 드러내어 도처에서 침략의 마수를 뻗치었으나 강화조약의「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벌써 세계 적화의 야망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6·25 한국전쟁을 계기로 어제의 맹우도 오늘엔 적이 되어 미-소 양국은 사사건건 대립항쟁을 하게 되었으므로 나는 영친왕으로 하여금 분단된 국가와 국민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지프차의 4인』이라는 영화를 감상토록 한 것이었다.
영화가 끝난 다음 영친왕은 나에게 저녁을 사주겠다고 그 부근에 있는 동경회관의「브르니에」로 데리고 갔는데「브르니에」는,「프랑스」식 생선 요리로 유명한 곳으로 생선을 좋아하는 영친왕이 제일 잘 다니는 고급「레스트랑」이다. 자리를 정한다음 영친왕이「크랩·칵테일」과「오이스터·그라탕」을 주문하는 것을 보고 나는『「지프차의 4인」은 재미가 있었습니까』하고 물으니 영친왕은 침통한 표정으로『분단된 해방이란 참 곤란하군요』라고 하면서 말을 더 잇지 못하였다. 이윽고 나는 또 물었다.
『예전과 지금을 비교해서 어느 편이 좋습니까.』
『그야 지금이 좋지요.』
『어떤 점이 좋습니까.』
『예전에는 누구하나 마음대로 만날 수가 없었고, 어디이고 자유롭게 다니지를 못했었는데 지금은 무엇이고 할 수가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렇지만 또 무엇이 있습니까.』
『그 대신 지금은 돈이 있어야지요.』
여기서 나는 행동의 자유를 얻은 대신에 이번에는 또「생활이 문제」라는 새로운 난관에 부딪치게된 그의 고충을 새삼스럽게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어떤 부자가 갑자기 생활이 어렵게 되면 큰집을 팔아서 작은 집으로 줄여가서 그 차액을 가지고 살아가듯이 그때의 영친왕도 꼭 그와 마찬가지였으니 지금은 약간 남은 돈으로「곶감 꽂이」빼어 먹듯이 생활하고 있지만 그것을 다 쓰고 나면 장래가 큰 걱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친왕이『생활의 자유를 얻은 대신에 이제는 생활자체가 문제』라는 말은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으며, 이 선량한 노신사가 적어도 생활비 때문에 외지에서 체면을 손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생각을 더욱 절실히 했던 것이다. 영친왕은 어느 날『자기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은 일이 있었다. 이 말에 대하여 나는『한양조 (이조) 5백년의 최후의 황태자로서 어디에 계시든지 최고의 명예를 보전하고 평온하게 일생을 보내시는 것입니다』라고 여쭙고 그 말에 덧붙여서 5백년이라는 연대는 한 왕조의 역사로는 결코 짧은 것이 아니니 그 위에다 또 사족을 붙일 필요는 없으므로 행여나 정치에는 간여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영친왕도 무릎을 치고 자기도 전혀 동감이라고 하면서 이전부터 정치에는 아무관심도 없으며 오직 바라는 바는 하루바삐 조국이 통일되어서 민생이 안정되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조국이 통일되면 당신도 환국해서 여생을 조국에서 보내고 싶다고도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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