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시론

"우리민족끼리"와 주사파의 준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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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송재윤
맥매스터대 교수

이석기는 진정 왜 그런 것일까? 일말의 자유도 없는 최악의 인권유린 국가, 인민을 굶겨 죽이는 극빈의 세습 독재정권, 인격숭배를 강요하는 수령 유일주의의 사회. 그런 북한을 그는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내란죄 성립 여부에 관한 법리를 따지기 전에 그의 심리가 궁금해진다. 한 좌파논객의 트윗처럼 이석기가 그저 정신병자인가? 그렇다면 ‘광기’의 국회의원 이석기가 오늘날 대한민국에 던지는 화두는 대체 무엇일까?

 1980년대 후반은 이른바 민중민주주의 ‘운동’의 대중화 시대였다. 그때 학생운동의 헤게모니는 ‘주사파’가 장악했었다. 당시 대학가의 ‘왕고’였던 이석기는 분명 점조직 같은 세미나에서 후배들을 모아 놓고 ‘의식화’ 교육에 앞장섰을 것이다. 그때 주사파 운동권들은 고전적 마르크시즘 교과서보다 김일성·김정일 등이 직접 썼다는 주사파 혁명 문건들을 더 높이 떠받들었다.

 김정일이 직접 지었다는 ‘주체사상에 대하여’란 짧은 문건은 당시 널리 널리 읽혔다. 몇 년 전 북한을 방문했던 남한의 한 철학자가 직접 텔레비전에 나와 김정일을 ‘사상가’로 치켜세우며 손에 쥐고 흔들었던 바로 그 문건이다. 그 문건엔 역사가 위대한 수령을 통해서 발전하며, 인민대중은 그런 위대한 수령에 무조건적 복종함으로써 역사의 진보에 기여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즉 위대한 수령은 역사의 발전법칙에 따라 가장 효율적인 전략·전술을 제시하므로 모든 인민은 일사불란하게 무리를 위해 자살하는 이타적 곤충처럼 몸 바쳐 수령의 지시를 따를 때에만 가장 효율적으로 혁명과업을 성취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공산당 무오류의 원칙을 표방했던 스탈린식 전체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수령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전체주의 이론의 가장 극단적 양상을 보인다.

 그런데 그런 ‘수령론’만으로는 주사파 운동권의 심리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들은 그들이 믿는 바 더 높고 숭고한 가치를 위해 수령에 대한 맹종을 방법적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몸 바쳐 이루려는 더 큰 가치란 무엇일까? 그건 바로 2000년대 한반도를 휩쓸었던 “우리민족끼리”란 구호 속에 압축되어 있다.

 결국 이석기를 지배하는 이념의 실체는 “우리민족끼리”로 표현되는 극단적 ‘민족주의’다. 수백 만을 아사시키는 최악의 세습전제의 통치라도 “우리민족끼리”만 살 수 있다면 이민족 지배 아래의 ‘부귀영화’보다 더 숭고하다는 허황된 발상이다.

 그런 혈연주의 집단공동체의 국가에서 가장 이득을 보는 집단은 바로 종족을 노예화한 ‘수령’과 그의 수족들밖에 없다. 김일성이 ‘민족’의 이름으로 ‘민족’을 노예화한 것이야말로 배타적 ‘민족주의’의 악마성을 보여준다. 78년 이후 중국의 현대사가 웅변하듯 북한의 인민이 살길은 “우리민족끼리”의 주술을 벗어나 개혁·개방을 통한 세계시장에의 합류밖에 없다.

 “우리민족끼리”와 같은 극단적 ‘민족주의’야말로 바로 이석기식 주사파를 키운 문화적 토양이다. 한데 역사가 증명한다. “우리민족끼리”는 바로 죽음의 길이다. ‘우리 민족’이 살기 위해선 “우리민족끼리”의 폐쇄성을 버리고 세계 모든 민족과 더불어 두루두루 잘 섞여야만 한다. 대한민국의 성공은 “우리민족끼리”가 이룬 기적이 아니다. 국경을 넘고 문화의 장벽을 넘어 세계의 모든 민족과 어울려 함께 이룬 접촉과 확산, 교류와 혼융의 결과다.

 국보법만으로 ‘이석기’의 재현을 막을 길이 없다. 대한민국에서 ‘주사파’는 “우리민족끼리”란 폐쇄적 민족주의를 숙주 삼아 자라난 대한민국의 뿌리 깊은 심리적 병증이기 때문이다.

송재윤 맥매스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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