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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혁명아 나세르 그의 생애와 일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루바·칸주크란 이스라엘의 점성가는 지난 7월에 이미 『나세르가 소련방문이란 숙명적 실수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종말에 다다르고 있다』고 예언한 일이 있다. 뉴요크·타임스지는 그 예언이 적중했을 때 나세르의 생애를 『비극적이고 장렬한 실패작』이었다고 논평했다. 그러나 나세르 자신이 생전에 『나는 정치가가 아니라 혁명가』라고 자처했듯이, 『혁명가 나세르』생애는 아랍민족주의의 검출한 기수로서 후세에 남을 것이다.
가말·압델·나세르는 19l8년1월15일 알렉산도리아시 바코스구의 카나와티가 18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난한 우편국 직원, 어머니는 알렉산드리아 토건업자의 딸이었다.
그 당시 이집트의 정치적 상황은 반영민족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던 때.
소년 가말은 집문 앞에 곧잘 구덩이를 파고 놀았다고 한다. 저녁 늦게 돌아오던 아버지가 그 구덩이에 빠져 혼이 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10남매의 장남인 가말은 아버지를 따라 나일 강상류의 하타토베로 이사를 가서 조그만 코란(회교의 비전) 학교에 들어갔다.
8살이 되던 해 카이로 의 한 국민학교에 입학해서는 부모를 떠나 백부집에 기숙하면서 일요일마다 하타토베의 집엘 다니러왔다.
가말 생애에 있어 제일 처음 찾아 온 액운은 그해에 어머니가 4번째 아들을 낳은 직후 돌아간 것이다.
어린 가말 소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그의 큰 아버지였다. 큰 아버지는 일찍부터 가말 소년의 가슴에 반영감정과 이집트사회의 모순에 대한 저항정신을 심어준 사람이다.
1935년 알·나프타·알·마스리아 중학에 들어가서는 영국지배하의 팔레스티나 아랍민족운동을 지휘한 학생활동을 주도했다가 퇴학당하고 일시 체포됐었다. 이집트의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첩경이 군부라는 것을 자각한 나세르는 카이로 대학법과를 희망하는 아버지의 의사를 듣지 않고 사관학교에 입학, 1938년7월, 20살의 나이로 졸업함과 더불어 보병소위에 임관. 아슈트 주둔보병소대에 배속되었다.
혁명동지이며 훗날 이집트 군사령관을 역임한 후 자살한 압델·하킴·아메르 장군을 만난 것도 사관학교재학 시였다.
임관 후 만난 동지엔 또 최근 나세르를 계승한 안와르·엘·사다트 부통령도 끼여 있었다.
봉건사회의 근대화과정엔 하급장교들의 저항이 적극적인 추진역할을 담당하는 단계가 있다. 나세르와 그의 동지들은 식민주의와 봉건질서를 대변하는 부패한 상관에 대한 항명투쟁을 전개했다.
2차대전이 일어나자 이집트는 영국을 몰아내기 위해 추축국에 기울었다. 영국군 탱크부대는 l942년 왕성을 포위하고 파루크 왕에게 『친연합국내각을 조직하든지, 망명을 하든지』택하라고 협박했다.
파루크 왕이 힘없이 굴복하는 것을 목격한 나세르는 쿠데타의 실현가능성을 확신하면서 외세에 허약한 봉건적 왕조의 타도를 결심하게 되었던 것. 이때 나세르는 대위로 승진해 있었다.
1944년6월, 나세르 대위는 타히야·카셈양을 만나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 26살에 신부는 22살. 두 사람은 신부의 언니 압델·하미디·카셈 여사네 집에 놀러갔다가 만나 약1년간 교제 끝에 결혼하게 된 것이라고. 그때 나세르는 이미 혁명적 청년장교들의 비밀결사 『자유장교단』을 지휘하고 있었다.
육군참모대학의 교관 나세르는 밤이면 쿠데타를 지휘하는 정력적인 오거나이저로 변해 있었다. 1942년에 조직한 『자유장교단』의 노선은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구애됨이 없이 반영·반봉건의 공동투쟁을 위해 극우의 모슬렘 형제단 최고지도자 하산·엘·바나에서 이집트의 극좌파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친교를 맺었다.
1948년5월15일, 이스라엘의 독립과 더불어 일어난 팔레스타인 전쟁의 패배에서 나세르는 두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째 최대의 전장은 이집트 국내라는 것, 둘째 봉건질서의 타도 없이는 근대국가를 수립할 수 없다는 것.
나세르는 이미 친위 쿠데타가 아닌, 봉건제도의 근본적인 타도를 계획하는 사회혁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l952년 나세르의 암살단은 부패한 군 수뇌 후세인·아메르 일가를 습격했다. 이때의 부녀자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나세르는 테러행위의 부질없음을 자각했다. 그리고 청년장교단의 신망을 높이기 위해 모하메트·나기브 장군을 명목상의 지도자로 영입했다.
1952년1월26일 아부딘 궁전에선 신왕비 나리만의 첫아들탄생을 축하하는 호화로운 파티가 열렸다.
부패왕조의 붕괴 전야에 열린 마지막 연회에서 파루크 왕은 신하들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세계의 왕 다섯을 꼽아 보라』 『폐하 말고 또 누가 있읍니까?』
『바보같으니! 영국왕하고 트럼프의 4킹이다.』
파루크는 이미 자신의 몰락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은 그날도 약탈·방화·폭동을 일으켜 이집트혁명은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해 7월23일 새벽 3시. 자유장교단은 카이로 시내를 무혈쿠데타로 완전장악하고 아랍 민족혁명의 횃불을 밝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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