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국정원보다 더 무시무시한 민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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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철호
논설위원

민주화 운동의 끈질긴 생명력은 민심에서 나왔다. 운동권은 기발한 정치적 상상력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1981년 봄, 대학마다 반정부 시위를 막느라 경찰이 쫙 깔렸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한 학생이 서울대 인문대에서 갑자기 유인물을 뿌렸다. 순식간에 경찰이 현장을 덮쳤고 학생들을 체포했다. 하지만 유인물을 본 경찰은 당황했다. 아무 것도 없는 백지였다. 학생들은 “와~”하며 웃음을 터뜨렸고, 경찰은 머쓱하게 물러났다.

 1974년 비상군법회의 법정.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구형받은 김형곤이 웃음 가득한 얼굴로 최후진술에 나섰다. “영광입니다.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저까지 사형을 구형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옆에 앉은 유인태는 잠이 많기로 유명했다. 그의 모친 박노숙 여사는 아들이 사형을 선고받는 순간 법정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어디 이뿐이랴. 김영삼·김대중·김근태 등도 모진 세월을 당당하게 견뎌냈다. 그것이 힘이었다.

 통합진보당의 이석기에게 이런 당당함은 찾기 어렵다. 좀 찌질한 느낌이다. 압수수색 때는 도피하고, 의원 특권과 당원을 방패막이 삼았다. “당당하게 임하겠다”고 해놓고 헌법 12조2항(묵비권) 뒤에 숨었다. 그의 변호인단만 20명이다. 수사 현장에는 수백 명이 구호를 외치며 응원한다. 맨몸으로 끌려가던 민주화 인사들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사치스러운 느낌이다. 오히려 속살이 들통난 얼치기 종교집단이 방송사에 몰려가 생떼를 부리는 장면과 겹친다.

 앞으로 사법처리 과정에서 국정원이 얼마나 치밀한 증거를 들이대고, 법원이 어떤 결심을 할지 두고 볼 일이다. 하지만 이런 법리논쟁 위에 ‘국민정서법’이 있다. 도덕적·감성적 잣대로 판단하는 무서운 불문율(不文律)이다. 한국갤럽에 따르면 이석기의 내란음모에 대해 61%가 ‘사실일 것’으로 보고 있다. ‘아니다’는 응답은 12%에 그쳤다. 싸늘한 민심의 현주소다. 이석기에겐 국정원보다 이런 우리 사회의 상식과 싸우는 게 훨씬 힘들다.

 우리 사회는 왜 그에게 등을 돌렸을까. 우선, 우리 뒤통수에 방아쇠를 당기겠다는 발상 자체가 소름 돋는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그를 “우리 자식의 등 뒤에서 비수를 꽂을 세력”이라 했다. 강한 배신감이 묻어난다. 물론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소중하다. 그렇다고 우리 공동체를 파괴할 자유까지 허용할 수는 없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는 운동권에 묘한 부채의식이 있었다. 도덕적으로 한 수 위라 여겼다. 하지만 통진당은 ‘날조다→모임이 없었다→모임은 있었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농담이었다’는 거짓말로 한 방에 말아먹었다. 우리 사회는 조롱당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국은 피땀 흘리며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뤘다. 북한은 거꾸로 세습왕조로 뒷걸음질했다. ‘북한=애국, 한국=반역’의 구도는 우리 공동체에 대한 모욕이자 시대적 착각이다. 녹취록을 읽어보면 지난 5월 이석기 그룹은 곧 전쟁이 터진다고 본 게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은 정반대로 판단했다. 중국의 승인 없이 북한은 전면전을 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더구나 가장 많이 잃는 쪽은 김정은이었다. 우리 사회는 이런 합리적 판단에 따라 평온한 일상을 살았다. 반면 이석기 그룹은 완전 오판했다. 대중보다 인식이 뒤떨어진 정파가 대중을 이끌겠다는 것 자체가 무모하다. 웃기는 일이다.

 통진당의 ‘이석기 구하기’는 눈물겹다. 그럴수록 대중과 더 멀어질 뿐이다. 당장 좌파의 자정능력은 기대하기 어렵다. 주사파가 20년 이상 진보진영을 압도하면서 진보를 재구성할 동력조차 찾기 힘들다. 새누리당이 추진하는 제명·정당해산도 한계가 있다. 그나마 유일한 희망은 화석화된 주체사상은 결코 국민적 공감을 못 얻는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는 민주화 운동과 종북을 구별하기 시작했다. 아마 최후의 심판은 2016년 총선이 아닐까 싶다. 한때 10%였던 통진당 지지율은 1% 밑으로 추락했다. 우리 공동체가 보내는 무시무시한 경고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