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이조의 정원발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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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우리 나라 교육의 정원 양식을 보여주는 한 뜨락의 꾸밈새가 경남 함양군 지곡면 도촌리에 남아 있음이 확인됐다.
이곳 하동 정씨 종가의 바깥마당 가로 꾸며놓은 이 정원은 동산을 장식하는 한 형식으로서의「석가산」으로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전통적인 사가 정원의 유일한 본 조기로 지목되고 있다.
옛날 규모 있는 대가집의 옛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 집은「문헌세가」, 즉 이조 초기 성종 때의 유학자인 정여창 (시호 문헌공)의 고택. 사랑채의 너른 마당주위 담 밑으로 1m 남짓하게 흙을 돋워 쌓고 12개의 크고 작은 자연석을 세워놓아 무산 12봉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었다.
무산 12봉은 적어도 신라 때까지 소급하는 우리 나라 정원양식의 하나이다. 1천3백년 전 문무대왕이 궁궐의 뒤뜰에 안압지를 파고 새와 화초 목을 가꿔 여러 가지 꾸밀 때 무산 12봉의 가경을 용궁 같이 본떴다고 옛 문헌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최근의 경주 안압지 발굴에서는 임해전 맞은쪽 물 기슭에서 그러한 돌들의 놓임 새가 드러나고 있어 이 조원양식은 한층 주목되고 있다.
무산은 시선이 노닌다는 설화로 얽혀 있어 옛 선비들 사이에 동경하는 정신세계의 산 이름이다. 중국 사천성 파산 산맥의 수봉을 가리킨다느니 혹은 상동성의 동북, 호남성의 동쪽 등 여러 설이 있으나 어쨌든 신선의 얘기에서 빠질 수 없는 절세의 아름다운 곳이다.
이런 무산에 대한 동경은 우리 나라 정원에서 가산 즉 조형적인 산으로 표현돼 왔다. 우리 날의 집터는 경사진 땅을 깎아 집을 지으므로 뒤쪽 언덕이 자동적으로 가산의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만약 평지의 경우라면 일부러 흙을 모아 동산을 만들고 나무를 심는다. 경복궁 자경전의 뒤뜰 자리에는 지금도 그 가산의 흔적이 역연하다. 또 전주 객사 등 꾸민 예가 허다하다.
이러한 가산 즉 동산의 꾸밈은 우리 나라 청원의 중요한 부분이 된다. 그것은 오래 집 뒤쪽에 해당되기 마련이고 앞에는 연지를 두게된다. 우리 나라 고유어에서 원정을「동산바치」라 하는 것도 그 점에 유인한다.
그러나 함양 정씨 가의 경우, 석가산은 예의적으로 집 앞에 두고 있다. 그것은 가옥의 사랑채와 안채가 동서종렬로 놓여 있는데다가 북쪽이 낮은 평지택기인 까닭에 대문 옆으로 동산을 꾸민 것으로 해석된다.
이 조그만 동산에는 약 5백년전 집을 지을 당시에 심었다는 산수유 고목이 대칭적으로 서있고 문 옆에 역시 고목인 모과나무 한 그루와 큰 반송이 이들 무산 12봉을 덮곤 있다. 물론 원상이 그대로 보존 돼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자연석과 고목을 제외하고는 근래에 다소 첨가된 것이 있다. 무산 12봉을 뒤덮고 있는 향나무와 화양목 그리고 수령 1백년을 헤아리는 전나무 등은 재래 정원수가 못된다. 오히려 이들을 제거한다면 훨씬 제 모습을 환히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고전축 전무가인 신형훈씨는 최근 이곳을 답사하고,『옛 모습대로 복원이 가능하며 한국정원의 본보기로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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