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대전의 25시(5)|미제 34연대의 붕괴(상)|6·25 20주…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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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국전쟁에 처음으로 투입된 미 지상군인 제24사단은 불운의 부대였다. 축차 투입된 이 사단의 각 부대들은 제105탱크사단(주=서울 점령 후 여단에서 사단으로 승격)을 앞세운 강력한 북괴군의 남침 물결에 차례차례 휩쓸리고 말았다. 미 24사단 21연대의 찰즈·B·스미드 기동부대가 오산에서 7시간의 격전 끝에 패퇴한 후, 곧 이어 적의 중압은 평택·천안에 포진한 미제 34연대에 밀어닥쳤다.

<평택전투로 적 전력 재평가>
평택·천안 전투는 미군이 처음으로 연대단위 병력으로 적과 대전했다는 것과, 이 공방전이 대전방어전 성패를 좌우한 것 그리고 맥아더 사령부가 이 전투를 통해서 비로소 북괴군의 전력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본국에 증원사단을 긴급 요청했다는 점에서 극히 중요했다.
다음에 소개하는 전기에서 보는바와 같이 미군은 이 평택·천안 전투에서도 북괴군 전력을 아주 얕잡아 보고 준비 없이 전지에 임했었다. T·R·페런바크 저『이런 전쟁』(This Kind of War)에는 미 24사단 34연대의 평택·천안 전투 상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스미드 기동부대가 오산 북쪽에서 처음으로 적 탱크 부대와 부닥쳤을 때 같은 24사단의 제34연대는 15마일 남쪽의 초라한 소읍 평택에 있었다.
7월3일에 대전에 도착한 사단장 딘 소장은 34연대 제1대대는 평택의 간선도로를 차단하고 제3대대는 안성에 포진하라고 명령했다. 제1대대의 군사들도 스미드 기동부대의 병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며칠이면 전쟁 끝날 줄 알아>
그들은 벌써 이 초라한 나라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다. 일본인 걸·프렌드가 이미 마음이 들떠 있을지도 모를 아늑한 일본의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기껏해야 며칠동안만 한국에 머무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장교들 역시 한국 전쟁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사병에게 정 훈 지식을 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누구나 다 미 군복을 보기만 해도 그 놈들은 돌아서서 줄행랑을 칠 거야 하는 자신을 갖고 있었다. 대대장 해럴드·아이레스 중령은 각 중대장을 불러 놓고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 북쪽에 북괴군이 있는 것으로 돼 있네. 훈련도 부족하고 무기를 가진 자도 반수 밖에 되지 않으니 힙도 안들이고 막아낼 수 있을 걸세.>
중대장들은 부하들 앞으로 돌아가서 이번 작전은 경찰행동에 불과하며 멀지 안아 다들 원 주둔지인 일본 사세보(좌세보)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 병사들이 경찰행동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경찰행동과 전투와는 좀 다르다고 생각한 것만은 확실하다.
여하튼 아리레스 중령의 제1대대 3개 중대는 평택 북방의 2마일 지점에 진을 쳤다. 소 병력의 수색대가 도로를 따라 북쪽을 갔다가 돌아와서 오산남방에 탱크가 있다고 보고했다.
이어 어둠이 내린 후 기진맥진하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스미드 기동부대의 생존자 4명이 아이레스 중령의 대대본부로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그들이 말하는 종잡을 수 없는 보고를 아이레스 중령은 액면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스미드 부대패전 안 믿어>
이때 자기 소속의 미 제25사단이 한국에 도착할 동안 제24사단 포병사령관을 대행하고 있는 바드 준장이 대대본부에 들렀다. 그는 오산을 탈출한 페리 포병중령과 막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딘 소장과 연락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작전 계획을 알 길이 없던 바드 준장은 평택의 사태에 참견하게 되었다. 스미드 기동부대의 참패에 약간 동요를 느낀 바드는 아이레스 중령에게 될수록 오래 진지를 고수하고 적의 측면진출이나 포위 공격에 각별히 조심하라고 말했다.
이어 바드 준장은 제 34연대본부로 가서 연대장 제이…라블리스 대령에게 각 대대를 남쪽의 천안으로 이동시켜서 진용을 공고히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라블리스 대령은 바드 준장이 지휘계열의 어디쯤에 위치했는가를 몰랐고 또한 전반적인 작전계획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바드는 준장이니까 그의 의견을 듣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라블리스 대령은 엄청난 과오를 범했다. 즉 그는 아직 접 적이 없는 제 3대대를 안성에서 천안까지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이래서 우측면이 그대로 노출됐다.

<적이 공격 못 할 것이라고 믿어>
이것은 딘 사단장이 예상도 못했으며 또한 행여나 그렇게 될까봐 가장 근심한 일이었다.
라블리스 대령은 두 달 전에 무능하다는 이유로 해임된 전 임자의 뒤를 이어 제 34연대장이 됐지만 그도 별로 유능하지는 못했다. 결국이 실책 때문에 라블리스 대령은 전투 중 연대장 직에서 해임되는 꼴이 됐다.
7월6일의 아침이 밝았다. 평택 북방의 제 1대대 A중대장 오스번 대위는 적의 공격은 있을 수 있으나, 아마 없다고 보는 편이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스미드 기동부대의 패잔병들이 나타난 터이니, 주의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으나, 어찌된 셈인지 명령 내용이 각 소대에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안개가 자옥 낀 아침이었으나 통조림 식사를 반쯤 마친 콜린즈 중사는 북쪽에서 엔진 소리가 울려오고 있는 것 같이 느꼈다. 쌍안경으로 보니 도로 위에 몇 대의 탱크가 아른거렸다.
탱크 뒤에는 갈색 군복을 입은 수많은 보병들이 논두렁에 흩어져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는 소대장 리들리 소위를 향해 소리쳤다.

<소대장님, 손님들이 온 것 같습니다.>
리들리 소위는 아마 후퇴하는 우군 스미드 부대일거다라고 대답했다.

<탱크도 있습니다 스미드 부대에는 탱크란 한 대도 없는데….>
그는 다시 고함을 쳤다.

<적군을 후퇴 우군으로 오인>
한편 아이레스 중령은 A중대장 오스번 대위의 지휘소로 가보았다. 그곳에서 둘은 논 속에 흩어져 있는 보병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나 눈앞의 시야가 흐려서 그 정체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아이레스 대대장과 오스번 중대장은 다같이 저것들이 아마 어제 밤에 녹아 난 스미드 부 대원이라고 생각하면서 몇 분동 안을 더 지켜보았다. 산 개해 있는 병력이 1개 대대를 넘고 그 뒤에 더 병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야 두 장교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이레스 중령은 즉시 박격포 포격을 명령했다.
첫 번 몇 발이 벌판에 가서 터졌지만 적은 아랑곳없이 다가왔다.
고지 위에서 콜린즈 중사는 선두 탱크의 포탑이 닫히는 모습을 보았다
탱크의 길고 흉악한 85㎜포가 콜린즈 중사 쪽을 향하더니 이내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콜린즈는『호 속으로 들어가!』하고 소리를 질렀다. 개인 호는 파놓았지만, 물이 고였다고 해서 거의가 밖에 나와 있었던 것이다 병사들은 연못 속으로 개구리가 뛰어드는 소리를 내면서 개인 호 속으로 곤두박질해 들어갔다.

<사격개시! 사격개시!>

<소대장 분대장만 사격>
콜린즈는 연방 외쳤다. 그러나 고지 위에서 다가오는 적군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지만 총을 쏘는 미군 병사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사병들은 입을 막 벌린 채 설마 적이 자기를 죽이겠느냐는 듯이 올라오는 괴뢰 병의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얼마를 두고 사격을 계속한 것은 소대장과 분대장들 정도였고 한방도 안 쏜 병사가 반 이상이었다.
아이레스 중령은 오스번 대위 지휘소에 서서 잠시동안 적의 공격을 바라보았다. 이어 그는 고개를 흔들며 A중대를 후퇴시키라고 일렀다. 그리고 나서 고지를 내려와 자기 지휘 본부에 들어가서 각 중대에 후퇴명령을 내렸다.
고지 위의 대군이 볼 때, 북괴 병은 까맣게 벌판을 질러오고 있었다. 우측의 B중대 역시 적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포탄 없는 75㎜ 바주카포>
10여대의 탱크가 도로 위에 한 줄로 늘어서서 더 바랄 수 없는 좋은 표적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의 75㎜ 바주카포에는 포탄이 준비돼 있지 않았다. 4.2인치 박격포도 관측 병이 적 탱크 포탄의 충격으로 정신 이상이 생기고서는 쓸모 없게 됐다. 반격 포를 조절할 줄 아는 병사는 그 관측 병 밖에는 없었으니까.
오스번 대위는 A중대를 평택남방으로 2마일 가량 후퇴시킨 다음 재편하기 시작했다. 부하들 가운데 적에게 발포하지 않은 자들이 많았다는 점에 화가 치민 콜린즈 중사는 생존자들 사이를 해치며 다니며 왜 쏘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10여명으로부터 총이 말을 듣지 않더라는 대답이 나왔다.
조사해본 결과 소총에 진흙이 끼여있거나 아니면 분해 소제 후 잘못 조립했다는 것을 알았다. 소총의 조립조차 모르는 사병들이 많았다. 중대의 배치된 것이 하루전이고 보니 그것은 선임하사관 콜린즈 중사의 실책은 아니었다.

<소총 조립도 못한 사병들>
A중대병력은 4분의1이 행방불명이 됐다. 비가 멎은 후 날은 무덥고 목이 탔다. 수통을 버린 그들은 지금은 짐승처럼 흙탕물이 흐르는 도랑과 인분비료로 썩은 냄새가 나는 논에 엎드려 물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후퇴 길에는 다른 부대가 버리고 간 철모·우의·혁대 심지어 소총까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오후가 되자 병사들은 비틀거리기 시작했고, A중대의 후퇴대열은 2마일 이상으로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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