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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이백(李白)의 “조발백제성”

중앙일보

입력

한중간은 수천 년의 교류의 역사가 있다. 양 국민 간 오랜 문화를 공유해 온 것을 바탕으로 서로 우의를 돈독히 하면 신뢰가 쌓여 갈 것이다. 지난 6월 중국을 국빈 방문한 박근혜대통령은 중국의 고사 성어를 인용하면서 중국어 연설로 중국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중국에 진출하거나 중국과 사업을 하는 우리 국민도 이러한 분위기에 맞춰 중국인과 인문교류에 더욱 관심을 가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중국에 다년간 살면서 중국 사람들과 다양한 형태로 교류해 왔다. 중국인 개개인은 학력과 관계없이 중국의 고전에 능통하고 특히 당시(唐詩)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중에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이백(李白)의 “조발백제성”을 첫 손가락으로 꼽았다. 이 시를 현대 중국 음으로 암송했을 때 즐거워하던 중국 친구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조사백제 채운간(朝辭白帝 彩雲間)
천리강릉 일일환(千里江陵 一日還)
양안원성 제부주(兩岸猿聲 啼不住)
경주이과 만중산(輕舟已過 萬重山)
(아침 일찍 동트는 백제성을 출발하여 천리 떨어진
강릉까지 하루 만에 돌아가네. 협곡 양안의 원숭이
울음소리 끊어지지 않고, 내가 탄 조각배는
단숨에 수많은 산을 지내 왔구나)

이백(701-762)은 중앙아시아와 실크 교역을 하는 부유한 무역상인의 아들로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 인근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어머니가 꿈에 금성(venus)을 보고 잉태하였다하여 태백(금성의 옛 이름)이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본래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소수민족(西域胡人)이었다. 그는 실크 생산지로 전문관원(錦官)이 상주한다하여 금관성(錦官城)이라는 별칭을 가진 성도(成都) 인근에 이주하였다. 실크 교역을 크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족(漢族)이 아니기 때문에 과거를 볼 수 없었던 이백은 크게 좌절하여 20대 전반까지 아버지의 돈으로 도사(道士)들과 함께 아미산(峨眉山), 민산(岷山)등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도교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20대 후반에는 사천성내에서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하고 돈 있는 자제들과 어울려 양자강(長江)을 내려와 강남을 유람하였다.

그가 시(詩)에 천재적 재능을 보여 궁정(宮廷)시인이 된 것도 황실과 관계가 있는 어느 여도사(女道士)의 추천으로 도교를 좋아하는 황제(현종)를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백은 한 때 황제의 총비(楊貴妃)가 먹을 갈고 황제의 측근 환관(高力士)이 이백의 흙 묻은 구두를 벗겨 주는 등 갖은 호사를 받으면서 황제 앞에서 시를 짓기도 하였다.

현종이 양귀비와의 향락에 빠져 국정이 어지러워지자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난다. 현종은 사천성으로 도망가고 황태자는 북쪽으로 몸을 피해 반란군과 싸웠다. 황태자는 주변의 권고로 부왕의 승인 없이 스스로 황제(肅宗)가 된다. 그의 이복동생인 영왕린(永王璘)은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강서지역에서 난을 일으킨다.

영왕은 여산(廬山)에 은거중인 이백을 불러내어 자신을 돕게 하였다. 그 후 영왕의 난은 숙종에게 진압되고 이백은 영왕을 도왔다는 죄로 귀주성(貴州省)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의 유배길이 백제성 근처에 이르렀을 때 뜻밖에 은사(恩赦)를 받게 된다. 그는 기쁜 나머지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작은 배를 빌려 동이 트기 전에 물길 따라 400km 정도 떨어진 강릉(湖北省 荊州市)으로 한숨에 달려 나온다.

중국사람 들이 “조발백제성”을 특히 좋아하는 것은 어려운 시절이 끝나고 동 트는 새아침처럼 희망에 부푼 이백의 기분이 이 시를 통해 문화 혁명등 암흑의 시절을 끝내고 희망찬 새로운 나라를 기원하는 중국인들의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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