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유럽」에서의 한국학 연구|이옥<파리대학 교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19세기부터 「유럽」엔 소개> 구미에 있어서의 한국학 연구는 우리나라가 제대로 「유럽」이나 미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19세기중엽 이후에 잠깐 활발했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 정확하게는 1910년의 한일합병 뒤에 점점 위축되었다. 이런 가운데 주로 학술적인 입장에서 한국을 알리기 위해 순수한 노력을 아껴지 않은 사람의 하나로 「프랑스」의 「샤를·아그노에르」씨를 들 수 있다.
이 분은 1920년대의 약10년간 일본·한국에 체류하면서 주로 언어학을 연구하는 한편 역사·민속 등에 관한 공부를 하여 「한국의 무속」이라든가 「코리아」, 「코레아」, 「코레」 등 한국을 가리키는 단어의 기원, 신간이라고도 불리는 「솟대」의 문제 등에 관한 여러 가지 논문을 발표했을 뿐 아니라 30년대의 우리나라 학자들 이병훈·손진태 박사들의 업적을 학보를 통해 널리 소개한 바도 있다.
이분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한국의 해방과 독립 뒤에 더욱 커져 1956년 초에는 「파리」대 문과대학 안에 한국관계강좌를 설치하는데 성공케 되었다.

<한국연구의 필요성 높아가> 그 뒤 거의 15년, 「파리」에서의 한국연구는 계속 발전을 거듭해왔다. 필자는 이분의 지도와 격려에 힘 얻어 처음부터 한국의 역사와 어학에 관한 강좌를 맡아 봤는데, 당시 꾸준히 이 강좌에 나오던 사람은 4, 5명에 불과했다. 초기의 이 학생들이 이제는 외교계나 실업계에서 크게 활약하고 있고 또 이미 교수가 되어 옛 스승들의 동료가 된 사람도 있는데 이 가운데는 한국에 약 5년간 유학한 뒤 「프랑스」로 돌아와 현재 「파리」의 동양어 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앙드레·파브르」씨가 있다.

<59년 파리대학에 연구소> 1958년 말부터 「유럽」에서는 한국연구의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정인섭 박사에게 지도를 받은 「스킬런드」씨가 「런던」대에서, 한국에 오래 머무르면서 공부한 「네덜란드」의 「포스」씨가 「라이덴」대에서, 한국에 잘 알려진 독일의 「에카르트」씨가 「뮌헨」대에서, 그리고 한국출신의 조승복씨가 「스웨덴」의 「웁살라」대에서 한국관계 강좌를 개설, 책임을 맡고 있다.
독일의 「보쿰」대 등 몇 개 대학에서도 한국에 관한 연구와 교수가 이뤄지고 있다. 1950년대 「파리」대에 이어 「유럽」의 여러 대학이 한국에 관한 강좌를 시작할 무렵인 59년 정초부터 「파리」에 있는 동양어 학교에 한국어과가 생겼다.
이학교가 동양각국의 언어, 즉 동구,「아시아」, 「아프리카」, 대양주의 모든 언어를 초보부터 가르치는 전문학교라는 성격을 고려하여 나는 「아그노에르」씨와 상의하여 한국어를 정규학제에 따라 초보부터 3년간 가르친 뒤에, 계속해서 공부하고 싶은 학생은 「파리」대학에 있는 강좌에 받아들이기로 해서 초급부터 고급까지의 연구단계를 설치했다.
이렇게 해서 59년 가을 「파리」대학 안에 「한국연구소」라는 순수한 연구기관이 만들어 졌으며 「파리」에서의 한국학은 점차 커갔다.
「프랑스」에 있는 한국 관계 자료가 정리되고 논문과 서평도 20여종이 되었다.

<한국의 전통예술에 큰 관심> 그 동안 학계에서도 점차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출판사 쪽에서도 이제는 사전을 편찬할 때 한국을 큰 조항으로 다뤄야한다고 생각하게되어 현재 「프랑스」에서 출판하고있는 「위니베르살리스」 백과사전 (20권 중 6권 발간)의 제4권에는 한국의 문화·예술·역사·지리·문학 등이 상세히, 또 「엔사이클로피디어·브리태니커」에서와 같은 심한 오류 없이 소개했다.
이밖에 세계문학사전, 연극사전 등에서도 한국에 관한 조항이 크게 다루어졌으며, 또 편찬중인 근대문학사전, 종교사전 등에서도 크게 다룰 예정이다.
우리 국내학자들이 「유럽」에 와서 하는 강연 등은 우리가 「유럽」에서 하는 일에 못잖게 효과적이다.
59년 10월 「파리」의 「기메」박물관에서 열렸던 이혜구 박사의 「한국고전음악』이란 강연회가 기억되는데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찬 청중가운데는 10여명의 저명 음악가가 섞여 있었다.
한국의 전통음악, 더 나아가 한국문화의 우수성에 관한 이때의 인상은 10년이 지난 오늘도 식자사이에서 얘기될 정도다.

<한국문화의 독자성에 놀라> 또 몇 해 뒤 「체르뉘스키」박물관에서 열린 한국 국보전은 이 박물관 개관이래 가장 큰 성황이었다. 여기에 초대된 당시 「파리」대 문과대학장 「애마르」씨는 『지금까지 나는 한국 문화가 중국 것에 의지하는 문화라고 막연하게 생각해 왔는데 이 전시회로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발견했다. 이런 경험은 내 일생에 몇 번 안 되는 경험이다』라고 필자에게 말했었다.
1960년 한국연구소가 한국 측으로부터 『이조실록』등 2백여권의 책자를 기증받았을 때 「애마르」 학장은 이를 찬양하면서 연구소의 예산을 증액해 주기도 했다.

<불 고등연구원에도 강좌설치> 국내외적인 노력에 힘입어 69년「파리」의 한국학 강좌가 또 확장되었다.
「프랑스」 문교부 직속의 고등연구원의 역사와 문헌을 연구하는 제4과, 언어학을 공부하는 제5과에서 각각 한국관계 강좌를 신설하여 필자가 그 강좌를 맡았다. 이 학교는 대학에서 보다 수준 높은 특수 강의와 연습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제 「파리」에는 「아그노에르」씨가 소장으로 있는 「한국연구소」를 위시하여 멀지 않아 박사논문을 제출할 「파브르」씨에게 내가 책임을 맡긴 「동양어 학교」의 한국어과, 내가 담당하고있는 「고등연구소」의 두 강좌, 그리고 「아그노에르」씨의 정년퇴직 뒤에 필자가 맡고있는 「파리」대학의 한국학과가 있어 한국연구를 위한 기구는 이제 완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국정부 지원 더욱 강화돼야> 「파리」대학 한국학과에서는 지난 학년에 한국소설 『박씨전』을 공부해서 박사가 된 「오랑주」씨와 내가 강의를 맡았었는데 다음 학년부터는 이를 더 확충해 철학전공의 이「레오」박사와 종교학 전공의 박병선 여사가 교수진에 들어올 예정이다.
이제 크게 확대된 「파리」에서의 한국학 연구를 위해 국내로부터의 더 큰 지원이 기대된다. 그 동안에도 국회도서관장 강주진씨, 연세대의 조의설 선생, 고려대의 김준엽 선생, 국립박물관의 김재원 전 관장, 최순우 미술과장 등의 도움은 잊을 수 없는 것이다.
현재 「런던」대학의 「스킬런드」 교수가 주동이 되어 추진하고 있는 「유럽」 전역에서의 한국연구 협조계획은 우리의 기대가 크다. 연구자들의 긴밀한 상호협조와 연결은 물론이지만 국내의 지원이 더욱 바람직한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