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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이준·이상설·이위종의 세 밀사는 고종황제의 뜻을 받들고 민족과 조국을 위해서 필사의 노력을 다하였으나 약소 국가의 비애로 아무 성과도 얻지를 못하게 되자 결국 이준 열사는 분통이 터져서 자결하다시피 해아에서 분사하고 이상설씨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거기 외교 고문 「헐버트」박사는 일단 서울까지 왔다가 합병이 되자마자 통감부로부터 퇴거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근대 한국의 가장 큰 사건의 하나였던 소위 「해아 밀사」사건도 나라의 운영과 함께 완전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는데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고종황제가 임금의 자리를 큰아드님 순종에게 넘겨주고 영친왕을 왕세자로 만들어서 인질로 일본으로 끌고 가는 한편 곧 이어서「합방」이란 미명으로 한국을 송두리째 삼켜버린 것을 생각한다면 근대 한국에 있어서 해아 밀사 사건의 중요성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1907년6월, 화란국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돌연 한국황제의 밀사가 나타난 것은 일본 측에 비상한 충격을 주었으며 이는 통감정치를 모욕하는 것이라 하여 격노하였다. 그보다 먼저 고종황제가 계신 덕수궁의 경비는 「보호조약」 후 「이또오」(이등박문)의 요청으로 일본 경찰이 담당하여 배일 사상을 가진 사람의 출입을 엄중히 단속하였으나 치외법권이 있는 외국인이 궁정 내부와 연락을 취하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어느날 영국인 「베텔」 기자가 서울에서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에 『보호조약은 고종황제의 승인을 얻은 것이 아니며 일본이 강제적으로 외교권을 뺏은 것이며 그러므로 한국황제는 그 조약의 파기를 바라고 있』는 기사와 함께 고종황제의 친서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한국 정부에서는 깜짝 놀라서 그 기사를 취소시키는 한편 이등박문도 문제가 커질 것을 우려해서 이번만은 문제를 삼지 않기로 하였었다. 그러나 곧 이어서 만국평화회의에 「해아 밀사」가 나타나니 문제는 중대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아에 가 있는 일본 대표단과 동경 정부로부터 「해아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밀사 출현 이라는 청천 병력과 같은 지급 전보를 받고 격노한 이등박문은 즉시 덕수궁으로 참내하여 고종황제를 뵈옵고 정말로 「밀사」를 파견하였는가 항의를 겸해서 여쭈어 보았으나 마음이 약한 고종황제는 다만 『그런 일이 없다』고만 하실 뿐, 도무지 태도가 분명하지 못하시므로 더욱 화가 치민 이등은 황제를 향하여『이러한 음험한 수단으로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시려거든 차라리 일본에 대해서 정정당당하게 선전포고를 하심이 좋지 않을까 하옵니다.』라고 말하였다. 한국통감의 위신이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진 것이 어지간히 분하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등박문은 수상인 이완용을 불러다가 『한국황제가 친히 보호 조약을 무시하고 보호국에 저항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일본으로서는 한국에 대해서 선전을 포고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국왕께 그 뜻을 여쭈어서 잘 처결하시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이완용은 이등통감의 태도가 예상 이상으로 강경한 것을 알자 즉시 각의를 열고 국왕을 참석하시게 하여 어전회의를 열었는데 당시 한국에 와 있던 대한매일신문 특파원 「나라하지」 기자는 그때의 모양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어전회의가 열렸을 때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은 『해아사건이라는 것이 이제 일한 양국간의 중대 문제가 되어 일본 측으로부터 강경한 항의가 있어 우리 나라의 책임을 물으려고 하고 있읍니다. 폐하께서 조종을 존숭하시고 사직을 위하신다면 즉시 그 진상을 명확히 하시와 당연한 재결을 내리시기를 바라옵니다.』라고 상주하였다. 이에 대해서 국왕은 『참으로 경들이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선후책에 대해서 의견이 있으면 무엇이고 기탄 없이 말해보라』고 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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