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9)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남과 북의 형세(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남침준비(2)>
북괴가 남침을 어떻게 빈틈없이 서둘러 준비했는가를 알기위해 당시 북괴에 있다가 그후 자유를 찾은 몇 민간인의 증언을 더 들어보기로 하겠다.
▲김백봉씨(당시 북괴 최승희무용연구소교사·현 경희대학무용교수·45) 나는 6·25가 나기 달포전에 문화선전상인 허정숙을 단장으로 하는 소위 조소친선공연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방문했어요. 하르빈에서 자무스를 거쳐 소만국경을 건널 때 소련으로부터 만주로 오는 대차에 대포와 탱크를 가득 실은 것을 보았지요. 밖을 내다보지 말라는 것을 커튼을 살짝 젖히고 보았는데 그때는 그 많은 무기가 중공으로 가는지 혹은 북괴로 가는지 몰랐어요.

<방소 공연으로 대소선전>
약 두달동안 4백여명의 음악가, 연주가, 무용가들로 짜인 우리단원들이 소련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이것은 남침을 앞둔 그들의 대소PR였어요.
내 직업이 직업인만큼, 북괴고관들 파티에 몇번 불려가 공연을 했습니다. 그때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이 있어요. 최용건(당시 민족보위상)이란 자는 술만 취하면 늘 "우리가 언제 죽을지 아나"하며 중얼거렸어요. 소위 연안파들 고관이 그런 소리를 많이 하더군요. 김일성을 비롯한 소련파는 "그것 들어왔어. 됐어"하며 쑤군거리는 것을 간혹 들었는데 그땐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나중에야 그것이 소련무기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한가지 가슴 아픈 것은 그때 16세된 내 여동생이 평양 제4여자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6·25나기 한달전에 1개월만 병원에 다니며 간호실습을 하라고 하더니 전쟁이 나자마자 아주 데려가 버렸어요.

<여학생에도 간호장교훈련>
아버지가 북괴의 고관이었지만 이를 박차고, 대한민국으로 넘어와 자유를 찾은 다른 한 여성도 그들이 남침을 위해 여학생에게도 군사훈련을 시켰다고 증언하고 있다.
▲허근욱씨(당시 평양외국어대학생·현작가·가정주부·40) 1949년10월부터 체육시간때 남녀학생 구별없이 군사훈련을 받았어요. 그리고 학생들에게 공산당 입당을 강요해서 내가 이에 이의를 제기하자 소위 자아비판이란 것을 시키더군요.
6·25가 터지기 전까지 학생들은 전쟁이 나리라는 것을 별로 짐작한 것 같지는 않아요. 전쟁이 난 후에도 북괴는 남한에서 먼저 쳐들어왔다고 선전해서 학생들은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했지요. 바깥 세상일은 통 몰랐고, 알 수도 없었으니까요. 전쟁이 나자 남학생들은 모두 군에 가고 여학생들은 평양시립병원에서 모두 간호장교훈련을 받았지요. 나는 그때 신병을 핑계로 장관급 가족이상만이 들어갈 수 있는 특수병원에 입원해 버렸읍니다.
북괴집단 우두머리들은 전쟁초기에는 아주 뽐내고 으시댔지만 얼마 안 있으니까 점점 풀이 죽어가더군요.

<북괴군 전력을 과대평가>
한편 6·25때에는 신의주교원대학 졸업반에 있다가 그후 소련 프라우다 평양주재 특파원으로 근무중 판문점을 통해 극적으로 북한을 탈출한 이동선씨(시사평론가·43)는 『북괴군의 장비가 한국군보다 월등 우세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들 전력을 너무 과대평가한 감이 있으며, 개전초기의 한국군 실패는 일부 지휘관들의 역부족에 있는 것 같다』는 색다른 조언을 하고 있다.
『북괴군의 장비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압도적으로 강했던 것은 아닌줄로 압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한대도 없는 탱크를 그쪽이 가졌던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개전초기의 한국군패배를 적장비의 우세에만 너무 치중해서 평가하는 감이 있어요. 오히려 일부 한국군 지휘관의 역부족에 더 책임이 있지 않을까요.
이것은 전쟁이 한창 진행중의 이야기지만 한가지 예를 들겠어요. 이북에서는 쌕쌕이라고 부르는 미공군 제트기 공격에 대해서 괴뢰군은 거의 속수무책이었어요.
이들이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수십명의 소총수들이 원을 쳐서 누워있다가 제트기가 아주 저공으로 들어오면 일제사격을 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쌕쌕이 사냥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해서 혹시 제트기가 떨어져도 조종사는 십중팔구 이내 헬리콥터가 와서 구조해냈지요.

<한달 전부터 북침했다 방송>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평양방송은 남침 1개월전부터 국군이 25㎞나 북침했다는등, 한국이 자꾸 전쟁을 도발한다는 식의 선전을 했어요. 남침구실을 찾으려는 대민 선전공작이지요.
각 대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작한 것은 1949년부터였지만, 그들이 남침을 준비하고있다는 짐작은 못했어요.
그리고 나는 신의주에 있었지만 탱크나 중무기가 들어오는 것을 몰랐는데, 그만큼 그들의 보안조치가 철저했던 게지요. 그리고 6·25까지는 괴뢰군은 지원병제로 정병주의를 취했는데, 전쟁이 나니까 마구 뽑아 갔읍니다.
북괴가 6·25남침을 위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총력을 동원한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역시 남침의 주역은 괴뢰군대였다.
그럼, 이제부터 북괴군의 성장과정을 대충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문제는 북괴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6·25전이나, 혹은 그후에 자유를 찾은 증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다.

<1946년부터 남침생각>
▲이기건씨(전 북괴군고급장교·현 내외문제연구소이사장·예포역육군준장·52) 『해방 그 이듬해인 1946년에 만주 봉천에서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사이에 당원증문제로 회의가 열렸을 때부터 북괴는 장차 무력으로 남침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어요. 그때 북괴는 당선전부장인 김창만이 이 회의에 참석했는데 그는 이 자리에서 중공대표에게 전쟁경험자가 필요하니 팔로군에 있던 조선의용군을 돌려 보내달라고 요구했어요. 명목상으로는 북괴군대창설에 이 의용군을 쓰겠다고 했지요.
앞서 말한 당원증문제라는 것은 북괴의 요원들이 중국공산당 당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창건과 더불어 이 당적을 옮기도록 한 것이지요. 북괴는 공산당 창건과 함께 즉시 군대조직에 힘을 기울였지요. 소련군출신이건, 연안출신이건, 평양으로 긁어모으기 시작했는데 전자는 소련군복에, 그리고 후자는 일본군복 비슷한 복장에 레닌모를 쓰고 거리를 누비더군요. 즉 1946년7월10일께에는 13개중대 병력으로 북조선 철도경비사령부를 설치했고, 그해 8월15일에는 북괴군의 모체로서 평양에 보안간부훈련대대를 설치했어요.

<보안간부훈련소로 위장창군>
대대사령관에는 보안국장이던 최용건을, 그리고 부사령관에는 김책이 앉더군요. 대대본부란 군대창설을 위장하기 위한 명칭이고 이것은 사실상 정규북괴군의 발족이었지요. 그 다음에 평남개천에 보안간부 제1훈련소를, 함북경남에 제2훈련소를, 다시 평양에 제3훈련소를 각각 설치했습니다. 1946년9월에는 이를 인민군집단 군총사령부로 개칭하고 2개 훈련소는 사단으로, 1개는 여단으로 개편했지요. 이렇게 북괴군이 정식으로 발족하자마자 46년부터 소제무기와 소식군대교본이 막 쏟아져 들어왔어요.
1948년2월8일에 김일성은 완전히 소련제 장비를 갖춘 3개 사단과 비행연대등의 직할부대로써 북괴군의 창설을 내외에 정식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1948년9월8일에 북괴집단이 수립되기 7개월이전의 사실이란 점에서 주목할만합니다.

<괴뢰정권 수립전 정규군보유>
나는 1948년5월에 이쪽으로 넘어와 자유를 찾을 때까지 2년동안 북괴군에 있었는데 밤낮 이남을 가상적으로, 그리고 미국을 봉건세력으로 몰아, 이를 타도하기위해 북괴군대가 필요하다고 역설합디다. 6·25가 나기 직전에 북괴는 주로 이곳 경찰에 해당하는 보안대로 배치했던 38경비여단을 조금만 남겨놓고 그 바로 후방에 정규군대를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함경도에서 편성한 부대는 평안도로, 평안도에서 창설한 부대는 함경도로 하는 식으로 이동하여 사병들의 고향생각을 일소했고 군관·사병할 것 없이 사상검토를 철저히 했지요.

<북괴군 주체 팔로군 출신>
또한 소위 38무역이라고 해서 북괴군 총사령부 정찰국 요원들이 대대적으로 38선에 나와 장사를 했는데 이들은 완전히 지형정찰에 목적을 둔 것이었지요. 이남은 진짜 장사꾼이고 이북에서 온 자들은 철저히 훈련된 간첩들이니 어떻게 되겠어요?
북괴군의 주체는 중공군 팔로군 출신의 조선의용군이라는 것인데 사령관이 김무형이었고, 처음 중국에서 들어온 병력은 불과 1백20명 정도였어요. 그러던 것이 차츰 늘어나 마지막에는 위안부까지 끼여들어 5천명이상이 들어와 북괴군에 편입됐지요.
끝으로 내가 이남에 넘어와 보니 북괴의 야전차에는 각종 화기가 갖추어져 있는데 국군에는 이에 대항할만한 무기가 없어 한심한 생각이 들었읍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