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시와 광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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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의정단상에 시론이 등장한 것은 좀체로 드문 일이다. 문제의 시는 담시 한편. 이 시를 놓고 형식이야 어떻든 광시라고 말하는 쪽도 있다.
담시는 세계문학사를 들춰보면 프랑스의 발라드(Ballade)에서 시작된다. 14세기 전후에 이런 시는 만개했었다. 그러나 유래는 더욱 깊다. 이탈리아의 칸초네가 발라드의 전신으로 지적된다.
칸초네는 근년 토니·달라라라는 가수의 아베·마리아에도 우리나라에도 익히 알려진 창법의 가곡.
시가 창을 타고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문학비평가들은 국민적 문학양식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문학이 귀족들의 한낱 노리갯감으로 궁정에서 흥얼거리던 형식에서 벗어난 계기도 여기에 있다. 창의 문학일수록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우의)를 깃들이며, 시대성을 품는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문학전통은 역연하다. 이른바 판소리-. 소박한 토속어로 구구절절이 엮어지는 창은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심청가·춘향가·적벽가·흥부가·장끼타령·변강쇠타령등은 오늘날에도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
이조 영조이후 서민들은 이 창극을 통해 마음의 눈을 뜨기 시작했다. 문학의 심연은 진리에대한 공감에서 비롯한다. 문학이 평민의 곁으로 다가간 것은 그 형식이야 어떻든 뜻이 깊은 일이다.
광시와 시와의 차이는 누구도 쉽게 판독할 수 없다.
"제일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이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러오. 제삼의 아해가"
이 시는 너무도 유명한 이적의 오감도-. 『제십삼의 아해…』까지 똑 같은 문구가 반복된다. 이 시가 193l년 조선중앙일보지에 발표되었을때, 세상은 광시라고 했었다. 그러나 후세의 문학사가가 이를 길이 기억하고있는것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절망의 시대에 대한 소망적 절규의 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0세기초엽에 유럽에서 다다이즘이 등장했을때도 그랬다. 광인들의 향언이라고까지 극언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시가 도덕이니 비도덕이니 하는것은 정삼각형이 도덕적이고 이등변삼각형이 비도덕적이라는 말과 같이 무의미하다"고 한 것은 미국 평론가 J·E·스피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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