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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명태의 비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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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러시아 극동 해역에서 명태잡이를 하는 한국 어업 회사들에 대한 러 당국의 조사가 진행되면서 수산물 물가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수산업계는 수익 악화를 걱정하고 있다. 러시아가 한국 어선의 현지법 위반을 이유로 명태 조업을 제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반독점청(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 격)은 최근 자국 해역에서 활동 중인 한국 어업회사들에 대한 1차 서면조사를 마쳤다. 조사는 지난달부터 시작됐다. 반독점청이 들여다보는 핵심 의혹은 한국 회사들이 현지 업체에 불법적인 방법으로 투자를 했는지 여부다. 러시아는 어업을 국가 전략사업으로 분류, 외국인이 어업 회사에 50% 이상 지분을 취득할 땐 정부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러 당국은 한국 업체들이 관련 절차를 어기고 러시아 업체들을 실소유하게 됐는지 살펴보고 있다. 해양수산부 관계자는 “만약 법 위반 사실이 드러나면 한국 회사들이 과태료 등 해당 처분을 받을 수 있다”며 “또 지분 취득에 대한 승인 절차를 다시 밟기 전까진 명태 공급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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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량 86% 차지 한·러 합작회사가 타깃

 현재 시중에서 팔리는 명태는 대부분 러시아에서 잡힌다. 지구 온난화로 바닷물 온도가 올라가면서 차가운 물에 사는 명태는 국내 해역에선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올해 초엔 정부가 어족 보호를 위해 “우리 해역에서 명태를 잡으면 시가의 10배로 사들이겠다”는 안내문까지 내걸었을 정도다. 또 한때는 일본산 ‘얼리지 않은 명태’(생태)가 찌개·탕 재료로 많이 팔렸지만, 2011년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엔 거의 자취를 감췄다. 그만큼 대표 수산 식량자원인 명태에 대한 러시아 의존도가 높아졌다.

 이 때문에 정부의 허가를 받은 한국 어선은 직접 러시아 수역까지 가서 명태를 잡아온다. 하지만 러 정부의 규제에 막혀 잡아올 수 있는 양은 연간 4만t에 불과하다. 한국인이 1년에 소비하는 26만t(국민 1인당 8마리)에 크게 못 미치는 양이다. 2만t을 수입하지만 이마저도 소비량을 채워주지 못한다. 한국 어선들이 합작회사를 통해 들여오는 20만t의 명태가 중요한 이유다. 한국 수산회사들은 지분을 투자해 러시아에 합작회사를 만들고, 이 회사가 잡은 명태를 한국이 수입하는 방식을 이용한다. 진출 기업은 14곳이고, 모두 23척의 배가 러시아에서 명태 합작 조업을 하고 있다. 올해 합작 명태 수입 예상 규모는 22만5000t이다. 원산지 표시는 러시아산으로 하지만 관세 감면 혜택을 받는다.

 이번 조사는 지난달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러 어업위원회 회의 결과가 계기로 작용했다는 게 국내 업계의 관측이다. 당시 회의에서 러시아는 한국 정부와 업계에 “극동 항구 주변 수산시장과 물류교역센터를 짓는 데 필요한 민간 투자에 협조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한국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국원양산업협회 관계자는 “한성기업 등 메이저 회사 몇 곳을 빼면 원양선사들의 자금 사정은 매우 열악하다”며 “이런 상황에서 돈이 많이 드는 사업에 대한 투자 요구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러, 투자 절차 문제삼아 위법 여부 조사 중

 반면 한국은 명태 1만9500t, 대구 450t, 청어 300t을 러 해역에서 더 잡을 수 있는 추가 조업 가능량(쿼터·Quota)을 확보했다. 지난해와 같은 양의 명태(총 4만t)를 한국 어선이 러 해역에서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 당국이 협상 실패에 따라 예상되는 손해를 반독점청의 한국 회사 조사로 만회하려는 것이라는 의혹이 나오고 있다. 조사 권한이 없는 러시아 수산청의 공보관이 최근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 기업이 불법으로 러시아 기업을 소유했다면 형사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 같은 의혹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당시 정부 대표로 참석한 신현석 해수부 원양산업과장은 “이번 조사와 지난달 어업위 회의 결과를 연결 지을 수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며 “당시 러시아의 요청을 우리가 거절한 게 아니라 ‘계획이 구체화됐을 때 더 많은 얘기를 나누자’는 취지의 의견을 전달했고 앞으로 관련 협의를 계속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 밖에 현지 러시아 국적 수산회사들이 제기해온 민원도 이번 조사의 계기가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러시아 극동해역에서 잡을 수 있는 명태는 1년에 160만t 정도다. 이 가운데 약 15%를 한·러 합작회사가 잡아가고 있다. 이에 수익 차질을 빚게 된 현지 수산업체들이 당국에 수차례 진정을 제기해 왔다는 것이다. 수산업계 관계자는 “러시아에서 어선 소유주들은 정·관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며 “이들의 민원을 당국이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양국 어업위서 밀리자 칼 빼들어

 정부의 가장 큰 걱정은 명태 가격이 올라가는 것이다. 명태값은 이미 예년에 비해 비싸졌다. 19일 기준 냉동 명태 소매가격은 2374원으로 1년 전(1969원)에 비해 17% 올랐다. 2010년(3394원)을 기점으로 안정세를 찾은 명태값이 최근 오름세로 돌아선 것이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유통정보팀 이정석 대리는 “여름은 명태 수요가 많지 않아 현재로선 소비자 체감도가 크진 않을 것”이라면서도 “공급량 추이와 가격 동향을 계속 지켜보는 중”이라고 말했다.

 러 당국이 한국 기업들에 법 위반 사항이 있다고 판단하면 일정 기간 명태 수급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지분 취득 과정을 다시 거칠 때까지 조업이 금지될 수 있어서다. 러시아산 명태의 직접 수입량을 늘린다 해도 가격 안정 효과가 크지 않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잡아들인 명태를 배 위에서 크기별로 분류하는 한국과 달리 러시아 어선들은 크기 구분 없이 한꺼번에 보관하는 등 조업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역 이후 이들을 크기별로 나누기 위해선 추가 비용이 들어 그만큼 가격이 올라간다. 합작회사 수준의 관세감면 혜택도 받을 수 없다. 또 러시아 어선은 잡은 명태의 머리를 잘라 냉동 보관하기 때문에 온전한 상태의 물고기를 선호하는 한국에선 상품 가치가 크지 않다. 특히 다음 달 추석 이전에 러 당국이 법 위반 관련 처분을 내린다면 소비자들의 물가 타격 체감도는 더욱 커질 수 있다.

추석 전 조업 금지하면 가격 상승 불 보듯

 제성훈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수산자원 수출만으론 외화 벌이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러시아도 알고 있다”며 “한국 기업이 러시아 현지에 수산 인프라 관련 투자를 하도록 독려하는 등 ‘한국이 러시아 발전에 도움을 준다’는 점을 알리기 위한 정부의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러시아, 갈수록 한국 명태 쿼터 줄여=한국은 1969년 러시아(당시 소련) 수역에서 어업을 시작했다. 이때는 소형 어선을 이용한 명태잡이가 대부분이었다. 배타적경제수역(EEZ) 제도란 게 없을 때였다. 이 때문에 소련은 자국 땅에서 3해리(5.4㎞) 이상 떨어진 곳에서는 자유롭게 조업을 허용했다.

 소련은 77년 EEZ를 선포한 뒤 외국 어선의 조업을 제약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91년까지는 극동해역 조업이 이뤄지지 않았다. 공식 조업이 재개된 시기는 한·러 국교정상화가 이뤄진 91년이다. 90년대 러시아가 한때 생물자원 보존을 위한 조업 중지를 선언하기도 했지만, 한국은 그동안 러시아 해역에서 최대 20만t(2001년)의 명태를 잡아올 수 있었다. 러시아로부터 그만큼의 쿼터를 할당받은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2000년대 들어 해양생물자원의 보존관리를 강화하는 내용의 법규를 대거 도입했다. 한국 어선에 대한 명태 쿼터는 2002년 2만5000t으로 크게 줄였다. 이때부터 한국 업체들이 본격적으로 러시아 업체에 선박과 자본을 투자하는 합작사업으로 전환하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는 또 쿼터, 통관 절차 위반 의혹 등 지속적으로 한국 의 불법 어업행위 가능성을 지적해왔다. 지난해 10월엔 “캄보디아 어선이 불법으로 잡은 게를 한국이 받아들이고 있다”며 한국 어업 쿼터의 박탈 가능성까지 알렸다. 지난달 국회를 통과한 원양산업발전법 개정안엔 불법 조업 수산물 검색을 강화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러시아의 이 같은 움직임을 의식해 정부가 제출한 것이다. 제성훈 위원은 “수산 자원 수출을 꺼리는 러시아 정부의 기조가 강화되고 있는 만큼 정부가 어업 분야에 대한 한·러 상생 발전안을 먼저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세종=최선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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