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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외국인 학자를 찾아|찬송가와 한국문학|신문학 연구하는 독일인 신부「슈미트」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아저씨! 어디 다녀오세요.』『엉, 시내에 다녀와.』「알베르트·수미트」신부(31)는 꼬불꼬불한 골목길에서 만난 동네 꼬마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미리 약속한 장위동「버스」종점에서 기자와 만나 집으로 들어가면서「슈미트」신부는 자기 동네를 소개한다.
] 『지금은 집이 많이 들어섰지만 여긴 아주 산골이었지요. 서울서 소 잃어버리면 장위동에서 찾는다는 말도 있잖아요.』
체한 2년밖에 안 된다는 우리말 실력이 이 정도다.
두간이 될까 말까한 온돌방에는 두 벽이 책으로 채워져 있었다.
주로 독문으로 된 신학관계 서적이지만 그 가운데는 조윤제의『국문학사』, 이홍직의『국사대사전』그리고 민족 문화 연구소간의『한국문화사대계』와 30권 정도의『아세아연구』등 한국발행 서적도 보인다.
그는 원래 선교신부로 한국에 왔지만 일요일 하루 이문동 성당에서 일하는 외에는 한 주일을 학교에서 보낸다.
한국외국어대 독어과 전임 강사로 10시간, 고대에서 2시간을 교단에서는 한편 고려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송민호 교수의 지도로「한국의 신문학」을 연구하고 있는 그는 석사 과정이라 한다. 69년 입학한 그는 지금 학위논문『기독교의 찬송가가 한국국문에 끼친 영향』을 위한 자료를 모으고 있다.
『이제 아주 초보단계예요. 아는 게 없어요』하고「수미트」씨는 낯을 붉힌다.
그는 독일의「딜링겐·도노」대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뒤「벨기에」의「루벵」예수회 대를 졸업, 신학석사학위를 받았다.
이어「런던」의 동양 및「아프리카」학교에서「스킬런드」박사로부터 1년간 한국어를 배웠다.
『처음에 외국에 나가서 선교한다고 생각하고 공부했는데, 독일에 온 한국학생들을 만나고, 한국에 가기로 했지요』라고 한국어를 배우게 된 동기를 설명한다.
독일에서 농업기술을 공부하던 윤태철씨와 간호원으로 온 김정자양과의 교우가 특히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는 그는 특히 김양과의 교분으로 지금 서울의 김양 집에 머무르고 있는데, 김양의 여동생은 그 대신 독일의 자기 집에 머무르면서 공부하고 있다고 들려준다.
68년 한국에 온 그는 4월부터 연세대「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익혔다.
『어학 실력도 신통 찮고 해서 처음엔 연구생으로 공부하려 했어요. 그러다가 이왕이면 본격적으로 공부하자고 시험을 치렀지요.』
대학원에서는 박성의 교수의「한-중 비교문학」과 송민호 교수의「작가론」의 강의가 특히 인상적이라고 한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는 김동인·이효석·나도향 그 가운데서도 특히 김동인의 단편『배따라기』에 감탄한다.
방법론적으로 볼 때 낭만문체로 시작해서「유토피아」적인 환상을 펼친 다음 자연주의적인 문체로 차츰 실질적인 얘기를 엮어 가는데『배따라기』는 내용, 문체, 수법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면밀히 또 정확하게 짜여 있다고 놀란다.
그는 김동인이「도스트예프스키」나「톨스토이」또는「졸라」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말한다.
양주산대놀이나 제주도 민속에도 관심을 보인 그는 진성기씨의『남국의 전통』『남국의 민요』등 책들도 서가에서 뽑아 보인다.
그가 한국의 풍속에 관심을 두는 것은 고향인「바바리아」지방의 농촌풍습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온돌방에서의 생활도 익숙하다.「바바리아」농촌 출신답게 한국에 온 첫날부터 한식을 즐겼다.
『아주 매운 돼지고기가 쇠고기보다 좋아요』라고 말한다.
그는 한국의 서민생활에서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내가 이 생활에서 불편을 느끼고 불만스럽게 생각한다면 이태원이나 한남동서 살았을 게 아니예요.』
자기가 타고 다니던「오토바이」를 어느날 밤 집에서 도난 당 한 뒤에도, 그래서「버스」출근을 하면서도 그는『이건 한국인들도 다 당하는 것』이라면서 웃는다.
그는 한국학분야에서 연구 성과를 얻으면 독일로 돌아가게 될 것 같다고도 말한다.
『선교는 유능한 한국사람이 차츰 많아지니까. 저는 한국연구에 전념하게 될 것 같아요.』 한편「슈미트」신부는 이번에 서울서 열리는 국제「펜」대회의 동시통역으로 발탁되어 영어를 불어로 통역하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동시통역은 처음하는 일이라 걱정이 태산같다고 말한다.『잘하는 사람을 찾아야지요. 없으면 하는 수 없이 맡더라도요.』 <공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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