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세보다 복지 공약 구조조정이 먼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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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을 추가로 부담하지 않고 대규모 복지 공약을 이행한다는 박근혜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 정책에 대해 전문가들이 불가능 판정을 내렸다. 본지가 경제·재정·조세 전문가 20명을 대상으로 지난 15~16일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다. 설문에서 응답자의 95%는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유일하게 “가능하다”고 응답한 안상훈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5년 동안은 가능하지만 그 이후에는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사실상 응답자 전원이 증세 없이는 지속 가능한 복지가 불가능하다고 응답한 것이다.

 해법은 뭘까. 응답자의 75%는 “증세에 앞서 공약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근 소득세 개편 파동에서 확인됐듯이 현재 경제 여건에서 즉각적인 증세는 사실상 어렵다는 인식에서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증세에 앞서) 구조조정이 먼저다. 재원도 없는데 공약을 다 하겠다는 것은 국민을 우습게 아는 일이다”며 재원 확보가 불투명한 공약 이행 계획의 비현실성을 지적했다. 김형태 자본시장연구원장은 “공약을 재검토해 무리한 게 있는지 보고 일부는 연기하는 방향으로 해야 할 것이지, 이번처럼 소득세만 의존하는 증세에는 한계가 있어 조세저항만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도 “과연 어느 부분에서 복지를 할지에 대해 다시 고민해야 하는데, 우리 수준에서는 최소한의 복지가 맞는 것 같다”며 “공약가계부에는 없지만 지방 사회간접시설(SOC)을 포함해 공약 전반에 대한 구조조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지적은 오랜 경기 침체로 당장 살기도 빠듯한 판에 세금을 더 내자는 데 찬성할 국민이 사실상 없다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오정근(아시아금융학회장) 고려대 교수는 “공약 재원 마련을 위해 비과세·감면축소, 지하경제 양성화, 정부지출 구조조정이 추진되고 있지만 모두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복지를 축소하는 길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복지 확대가 불가피하다면 국민 부담을 그만큼 늘릴 수밖에 없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대통령이 약속한 수준의 복지는 불가능하다”고 전제하고 “복지 확대에 수익자부담의 원칙이 최소한이라도 적용돼야 사회정의에 부합하고 사회의 지속가능성에 도움이 된다”고 지적했다. “복지 좀비를 양산해서는 건전한 발전이 불가능하므로 조금씩이라도 모든 국민이 세금 부담을 분담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박근혜정부의 복지시스템 설계에 참여한 안상훈 교수조차 “복지를 확대하려면 모든 국민이 부담을 져야 한다. 서구 선진국가에서는 모든 국민이 다만 10원이라도 낸다”고 강조했다. 이런 주장은 결국 복지 확대는 곧 증세를 의미하는 것으로, 증세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복지 확대도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정부가 수정해 내놓은 세제개편안에 대한 평가도 박했다. 응답자의 60%가 소득세 부담 증가 구간을 상향 조정한 데 대해 부적절한 미봉책이라고 응답했다. 이의영 군산대 교수는 “원점에서 재검토하라는 대통령의 지시와 다르다”고 지적했다. 증세의 우선순위에 대해선 고소득 자영업자 탈세조사부터 강화해야 한다는 응답자가 40%로 가장 많았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조세체계를 전면적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응답도 35%에 달했다. 고소득 자영업자 탈세조사나 법인세·소비세 인상과 같은 땜질식 대책으로는 안 되고 조세 체계 전반을 근본적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뜻이다. 윤증현 전 장관은 “지방세를 포함해 조세 체계 전반에 걸쳐 개편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복지 확대 비용을 누가 부담할지’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70%가 “모든 국민”이라고 밝혔다. 복지를 확대하려면 국민 부담도 늘어나야 한다는 복지 정책의 원칙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최원석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복지 지출의 우선순위를 정해 필수적인 것부터 먼저 지출하면서 복지지출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며 “복지 지출을 줄이지 않는다면 이번 소득세 개편처럼 간접적인 증세가 아닌 보다 직접적으로 증세를 도모하되 국민에게 상황을 소상히 알리고 이해를 구하는 설득작업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보편적 복지와 맞춤형 복지에 대한 논란도 가열될 전망이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보편적인 복지는 보편적인 증세를 통해 재원을 조달해야 한다. 복지 혜택을 받는 모든 국민이 부담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반면 강병구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소장은 “저출산·고령화, 양극화, 고용 없는 성장 시대에 지속적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복지 확대가 필요하다”며 “우리나라는 아직도 국민부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낮기 때문에 복지를 확대할 여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세종=김동호·박성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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