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간 죽마지우 영친왕|볼모배행했던 외사촌 엄주명씨의 회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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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영친옥 이은씨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서울 성북구정릉동10 병석에서 전해들은 엄주명씨 (75·진명학원 이사장)는『한 많은 국난에서 달리다 끝내 먼저 가시다니…』하면서 말끝을 체 잇지 못했다.
외사촌이자 유일의 죽마지우인 엄씨는 영친왕 이은씨가 63년 전 볼모로 일본에 끌려갈 때 말동무로 따라갔던 수행원의 한 사람.
을사보호조약당시 지금 대법원 자리앞에 살았었다는 엄씨는 일가가 배일파라고 해서 영친왕이 있는 덕수궁 출입이 금지되었는데도 구름다리를 타고 몰래 넘어 들어가 소꿉장난을 하며 놀았다.
엄씨에 의하면 영친왕은 어려서부터 어른처럼 의젓한 품이 많았다. 소꿉장난도 병정놀이 아니면 아이들을 가르치고 채점을 해주는「선생놀이」를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는 것은 덕수궁 중화전에 불이나던 날의 밤일. 훨훨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도 영친왕은 하나도 겁나는 티가 없이 기관차 등속의 장난감을 모조리 챙겨내었다는 것이다.
화재 사건뒤 일본관헌의 덕수궁 출입금지 조치가 강화되면서부터 이 소꿉놀이 왕래도 막혀 5년동안 서로 떨어져야만 했다.
그러다 1908년의 섣달 어느 날, 엄씨가 대한문앞에서 이발을 하고 나오는데 문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옆 사람 더러『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더니 뜻 밖에도 영친왕이 내일 일본에 불모로 간다는 것이었다. 엄씨는 대한문 왼쪽 기둥에 꼭 붙어 지켜보았다. 마차가 나오면서 용케도 그 안에 탄 영친왕과 엄씨의 눈이 마주쳤다. 그날 밤 악선재에서 엄씨집에 전화가 왔다.
이등박문한테서도 허락을 받았으니 내일 당장 일본으로 영친왕을 모시고 가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둘은 다시 만나 붙어 다니게 됐다.
일본으로 떠나는 날 아침은 무척 매서운 날씨였다. 수행원은 궁내대신 이윤용과 송병준, 조동윤등 대신 3명과 조대호, 서병갑, 증아만(일본인)등 공부친구 4명을 포함, 모두 15명.
일관헌이 양옆에 꽉 지켜, 어머니인 엄비한테 인사조차 변변히 드리지 못했지만 떠나는 날의 영친왕의 표정은 11세의 어린나이 치고는 너무나 근엄했다.
슬픈 빛조차 거의 밖에 나타내지 않은 채 묵묵히 악선재를 뒤로했다.
인천까지 마차로 가 일군함 만주환편으로 건너갔다. 동경역두에는 일 황태자도 나오고 겉치레로는 환영이 대단했다. 이날 밤 영친왕 목욕탕에서 처음으로 엄씨의 손을 꽉 잡았다.
『귀성(엄씨의 아명)아, 어머니 보고싶지 않니』하면서 눈이 붓도록 목욕당안에서 엉엉 울었다는 것이다.
악선재를 떠나온 뒤 처음으로 피나는 눈물을 낸 울음이었다.
처음 지이궁서 머무르다 이듬해 2월, 조거판각용저로 이사했다. 아침 점심은 양식, 저녁은 한식만 나왔는데 그 뒤 동경무관 조동윤씨가 와서 한식을 먹게 되었다. 영친왕은 또 엄비가 늘 보내주는 한복을 집안에서 즐겨 입으며 어머니를 그리워 했다.
불운의 이조 마지막 태자에게 슬픔은 자꾸 더해갔다. 어머니 엄비가 돌아가셨다는 부음이 오던 날 영친왕은『모든 일은 다 끝났구나. 이제 내 할일은 공부뿐이다』라면서 날이 새도록 울부짖었다.
그런 뒤부터 영친왕의 성격은 더욱 과묵하기만 했다.
거의 말이 없고 간혹 가다 입언저리에 엷은 미소를 지을 뿐 희노애락의 표정을 나타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영친왕은 유년학교를 거쳐 육사29기로 입학했고 엄씨도 뒤따라 30기로 들어갔다.
영친왕은 거의 공부밖에 몰랐다. 종일 말없이 책만 파고들어 육사재학중 줄 곧 모범우등생이었다. 특히 영어에 능숙, 유년학교 졸업때에 일황제 앞에서 영어강연을 해내 갈채를 받기까지 했다.
육사를 나와 소위로 임관, 근위보병 제2연대에 첫 근무, 이후 4사단장, 항공 총사령관등 중장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특히「프랑스」전사에 조예가 깊어 육대강연에선 많은 인기를 끌었다.
육군중위때 방자여사와 결혼한 이래 방자여사의 내조는 지성스러웠다.
해방전에 방자여사와 함께 10여차례 모국을 방문, 진명·양정등 구황실이 세운 학원을 둘러보기도 했다는 것.
61년 엄씨가 다시 일본에 건너가 영친왕을 뵈었을 때 그때만 해도 거의 의식불명의 중환에 있었으면서도 그는『모국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심정』을 여의치 않은 눈짓과 손짓으로 하소연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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