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 다음이 무당 … 철저히 소외당한 무속 제대로 짚고 싶었죠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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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의 김금화 만신 신당에서 열린 칠성제석굿 ⓒ이진환
김금화 만신의 내림굿 장면
영화 ‘만신’의 주요 장면들. 1 경기도 적군 묘지에서 진오귀굿 하는 모습. 2 폐병 환자 박씨를 위한 병굿 중 칠성제석걸이. 3 배우 문소리가 중년의 김금화 만신을 연기했다. 4 2012년 인천 앞바다에서 펼쳐졌던 서해안 배연신굿의 절정 장면.

혹자는 아직도 그를 ‘영화감독 박찬욱의 동생’쯤으로 소개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박찬경(48)은 다른 타이틀로도 충분히 ‘얘기가 되는’ 인물이다. 미술계에선 중견의 미디어 아트 작가이자 날 선 비평으로 이름난 평론가요, 영화 동네에선 제작·연출에 시나리오까지 직접 하는 멀티 플레이어로 통한다. 최근엔 내년에 열리는 제 8회 서울 국제미디어아트 비엔날레의 예술감독으로 선임됐다. ‘종합예술인’이란 표현이 희화화되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적확한 표현이 있을까 싶다.

그럼에도 지금 미디어아트 작가냐 영화 감독이냐를 놓고 저울질해본다면 후자에 꽤 기울어 있다. 스마트폰으로 영화(‘파란만장’)를 찍고, 상업 브랜드의 홍보 작품(‘청출어람’)을 만드는 일이 연이어 화제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뭣보다 요 몇 년 공들인 영화 한 편의 촬영을 마쳤기 때문이다. ‘만신(무당을 높여 부르는 말)’이란 제목을 단 작품은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이자 황해도 무당인 김금화 선생의 일대기를 다뤘다.

여느 감독들처럼 그도 ‘자식’ 하나를 낳아놓고 “흥행이 잘 돼야 할 텐데…”라며 애정을 피력했다. 하지만 묻고 싶었다. 왜 하필 손님 끄는 수많은 얘기들을 놔두고 무속신앙을 택했느냐고. 웬만하면 피해 간다는 신앙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고른 속내가 궁금해 5일 서울 청운동에 자리한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김금화 선생 일대기

‘만신’은 신작이지만 아주 신작이라 할 수도 없다. 전작 두 편에 뼈대를 만들고 살을 붙여 완성했기 때문이다. 열일곱 살 김금화의 내림굿 이야기를 담은 ‘그날(2011)’, 무당이 된 뒤 한국전쟁이 나자 남과 북 사이에서 첩자로 오인받는 이야기를 그린 ‘갈림길(2012)’을 중심으로 주인공의 출생부터 현재까지를 촘촘하게 엮어냈다.

관객이 느낄 기시감을 우려하자 그는 되레 부족함을 토로했다. “이번 작품으로 단편으로 풀 수 없는 깊이와 감정을 보여주긴 했어요. 하지만 누군가의 인생을 2시간 안에 다룬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나요. 그저 중요한 순간들만 보여주는 허구에 가깝죠.”

그에게 김금화란 인물은 단편 두 작품도 모자라 장편을 욕심낼 만큼 매혹적이었다. 2년 전 우연히 선생의 자서전인 『비단꽃 넘세』를 읽고 “바로 이거다” 싶었다. 드라마틱한 한 무당의 개인사에는 우리의 근현대사가 그대로 투영돼 있었다. 일제시대 위안부가 되지 않기 위해 조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소녀, 마을 가가호호 속사정을 속속들이 안다는 이유로 남·북한군 모두가 총을 겨누게 되는 무당의 숙명, 정전 뒤에는 근대화와 산업화의 물결에서 ‘미개한 종교인’으로 취급되는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는 선생을 바로 찾아갔고, 영화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굿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애도의 수단으로서의 영화, 굿에서 느껴지는 종교적 카타르시스가 관객들에게 전해지길 바랐죠.”

문제는 제작비였다. 어쩔 수 없어 일단 단편이라도 만들기로 했다. “영화를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를 불완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현재 ‘만신’은 후반 마무리 작업비 마련을 위해 크라우딩펀딩(www.funding21.com) 중이다.

돼지머리에 돈 붙이는 속물성, 작두 타는 성스러움

그는 이전부터 무속을 여러 작품에 녹여냈다. ‘신도안’(2008)에선 계룡산에서 사라진 토속 민중종교의 일대기를, ‘파란만장’(2011)에서는 이승과 저승의 교차를 보여줬다.

무당을 다루는 만큼 ‘만신’에서는 다양한 굿이 나온다. 선생이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은 배연신굿과 진오귀굿·내림굿·병굿 등이 등장한다. “돼지머리에 돈을 붙이는 속물적 행위와 작두를 타는 성스러운 절차가 함께 달라붙어 있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굿의 매력이다.

지난 2년간 선생을 따라 굿판만 마흔 번 가까이 따라다녔다. 고사·축사·점을 보는 자리를 하나하나 촬영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독일인 가정의 의뢰로 벌어진 굿. 판이 절정에 이르자 난생 처음 듣는 비명이 가족들에게 터져 나왔고 무당들조차 두려워했다고 했다. 혹여 그렇게 다니다 보면 무슨 공수(신 내린 무당이 신의 소리를 하는 것)라도 듣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직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작품활동 초기 냉전과 분단을 주제로 삼아 왔던 그가 왜 무속을 다루게 됐는지 설명하려면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일도 안 풀리고 뭔가에 기대고 싶던 그때, 자연스레 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한데 어쩐 일인지 대학 졸업 직후 경험한 계룡산이 생각났단다. 계룡산에서 한 행사가 있었는데 거기서 우연히 보름달이 비치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는 당시 느낌을 “신앙 간증처럼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충격적 체험”이라고 했다.

“제 체험을 신비화하고 싶진 않아요. 어쩌면 굉장히 보편적인 감정일 수도 있어요. 가령 밤에 출렁이는 바다를 보면 확 무섭고 그렇잖아요. 자연의 위대함이 공포와 접하면서 종교로 느껴졌던 거죠.”

이런 개인적 경험 말고도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무속은 바로 ‘근대’를 돌아보는 주제라는 것이다. 과거 민중의 고통과 혼란을 고스란히 담은 예술이면서도 전혀 다뤄지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전통 문화에서 가장 심하게 억압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봤어요. 우리 어머니가 그러셨죠. 백정 다음이 무당이라고. 계급 이하의 계급이라고요. 그런데 보세요. 판소리나 다른 국악기들이 다 굿에서 나왔다는 건 정설이에요. 우리 전통문화의 뿌리인데도 가장 철저하게 소외받았던 무속을 다시 볼 필요가 있죠.”

그는 무속을 보는 이중성도 지적했다. 무속을 미신처럼 터부시하면서도 삼풍백화점 붕괴나 대구지하철 참사 때처럼 남은 자들이 가장 마지막에 기대는 것은 진혼굿이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 것을 업신여기며 살아 왔어요.” 그는 되레 “무속이 갖는 환상·판타지가 상상력의 발판이 된다”면서 “아이들이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을 보며 환상의 기반을 갖는다는 게 과연 옳은가도 생각해 볼 문제”라고도 했다.

형 박찬욱 감독과 장르불문 공동 작업
그가 갤러리와 영화관을 넘나들 수 있는 건 경계가 모호한 작품 덕이다. 비디오와 사진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 아트는 시각물 자체가 하나의 스토리이자 메시지가 된다. 그는 “세상이 점점 전문화되는 마당에 이것도 저것도 못 될 수 있다는 공포를 느낀다”면서도 “구획 짓기가 아직은 싫다”고 했다.

그 말 속에는 작가로서만 산다는 것의 답답함이 내재돼 있었다. “한국은 독특해요. 서울에서 전시를 하면 지방을 돌거나 해외로 가는데 제약이 있죠. 중국이나 일본과 교류도 적고. 그러니 미술가가 미술만 해서 창조적 작업을 해 나간다는 것이 굉장히 힘든 구조예요.”

그는 젊은 작가들에게 영화제 출전을 권유한다고 했다. 매체가 대중화된 시대에 작가는 어떻게든 다양한 관객을 만나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영화라는 것은 미술가에게 그래서 하나의 대안이 되죠.”

형은 그 대안을 좀 더 넓혀주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더구나 형제는 아예 ‘PARKing CHANce’라는 둘의 이름이 묘하게 조합된 브랜드를 만들었다. 주차 자리 찾는 자동차처럼 ‘기회가 되면 들이댄다’는 의미다. 장르에 구분을 두지 않고 생산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모토로, 상업광고부터 재능기부까지 제한이 없다. 최근엔 서울시민들이 찍은 영상물을 뽑아 작품으로 구상하는 작업(‘우리의 영화, 서울’)도 맡았다.

“둘이 같이 하면 창조적 아이디어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재밌다”는 그에게 형보다 나은 점이 뭐냐고 물었더니 한참 뒤에야 답이 돌아왔다. “(영화를) 늦게 시작한 만큼 기존의 규칙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거 아닐까요.”

반면 약점이자 애로점으로 ‘시간 부족’을 꼽았다. 여전히 한 가지 주제를 잡고도 ‘글로 쓰면 이렇겠구나’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겠구나’ 하는 생각이 마구 떠오른단다. “매체마다 다른 언어로 표현되는 그 자체가 흥미롭죠. 좋은 작가는 그러면 안 되는데 전 습관이 된 거 같아요. 하나에 많이 투자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그러면서도 2년쯤 뒤엔 개인전도 열어야 하고, 장르 영화도 도전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지천명을 바라보는 그가 앞으로 무슨 일을 더 벌일지 궁금해지는 이유다.

중앙선데이 이도은 기자,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BOL 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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