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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윤리를 그린 비 작가적인 독일작가 귄터·그라스의 국부마취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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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사색하고 비판하던 거인이 모두 입을 다문 유럽에 그 공백을 메우고 등장한 권터·그라스는 올해 42세의 젊은 독일작가다.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새로이 안겨준 신작 『국부마취제』는 어두운 화법에 그라스 특유의 유머로 서구문화 속의 저항의 윤리, 특히 자유주의의 무력과 괴리를 표출하고 있다. 그는 독일인으로서는 극히 비 작가적인 작가다. 시와 희곡을 쓰는가하면 조각을 하고 재즈단에도 관계한다. 정치에도 간여, 지난여름에는 빌리·브란트의 선거유세로 전국을 누볐다.
그의 첫 작품 『양철북』은 1백50만부가 팔리고 미국에서도 60만부가 팔린 인기 소설이다.
여기서 그는 나치의 죄악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네번째 소설인 『국부 마취제』는 잘사는 사람들, 학생봉기, 월남전의 도덕적 상처 등이 주제다. 『주여! 우린 어떤 짓을 했읍니까?』란 『양철북』의 질문은 이제 『국부마취제』에서 『주여! 우린 지금 어떻게 하오니까?』로 변한 셈이다.
병든 중산층을 들추어내면서 그는 『위기를 주라! 70년대의 중산층 사내들이 무슨 결정을 할 수 있나?』 『임무를 주라! 그걸 해낼 수 있나?』고 따진다.
『국부마취제』의 주인공은 40세의 총각인 고교교사 스타러쉬와 학생 필립 그리고 치과의사다. 서베를린에서 25년째 살고있는 스타러쉬는 전통적 서구문화로 무장한 지식인이나 현대의 병리에 무력하고 생기 없는 나날을 보낸다. 필립은 월남전의 네이팜탄 사용에 비분 강개하는 그의 제자다. 필립은 그러나 분신자살을 기도하지는 않고 개를 공중 앞에서 불태우기로 한다. 이는 그의 소심이 아니라. 지치고 시니컬한 서베를린인들이 17세 소년이 분신에 하품이나 하리란 현실 진단에서다. 오히려 그들이 아끼는 한 마리의 개의 죽음에 더 놀라리라는 것.
애제자 필립의 행동에 스타러쉬교사는 전혀 무력하다.
여기에 치과의사가 등장한다. 그는 인간의 역사는 종국에는 기술지상이란 슈펭글러의 예언으로 무장한 현대 기술문명의 사도다.
이 소설에 내적 힘을 주는 요인은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 있다. 그리고 치과의사가 대변하는 기술은 그 내용에 더 큰 사상성을 부여한다.
이 소설에서 자신이기도 한 스타러쉬교사를 통하여 그라스는 묻는다. 『필립, 너는 무질서에 빠지지 않고 디오니소스가 될 수 있느냐. 그리고 치과의사 당신은 병원처럼 무색 무취의 소독실이 아닌 데서 질서와 이성을 구할 수 있느냐.』 『국부마취제』가 서독에서 나오자 그라스는 학생들의 질문을 자주 받는다. 『당신은 비판하고 현실을 파헤쳤다. 왜 처방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 나는 작가』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작가로써 충분한 대답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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