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패션·모델」의「개런티」1호|조혜란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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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극작가의 작품이 배우를 통해 구현되듯「디자이너」가 만들어낸 작품은「패션·모델」의 입음새를 통해 빛을 발한다. 새로운「모드」들이「쇼」의 형식을 빌어「스테이지」위에서 발표되기 시작하면서「패션·모델」들은 연극배우가 갖는 연기의「프라이드」와 폐막의 공허를 함께 지니는 전문직업으로 자라게 되었다.
1900년, 미국 유학에서 B·A학위를 받은 한국최초의 여성 하난사씨가 양장을 시작한 이래 한국의 양장사는 70년을 넘기고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양장사는 동란후부터라고 볼 수 있으며「패션·쇼」가 시작된 것은 57년, 58년 무렵이었다.
이때의「모델」은 양장점의 단골손님이나 여배우들이었다.「쇼」의 출연료는 물론 없었고, 「쇼」에 입고 나가는 옷값의 반을 지불하고 그옷을 사입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이 「아마추어·모델」들은「패션·쇼」출연을 상당한 기쁨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출연료를 받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안하고 있었다.
60년 4월. 재일교포「디자이너」김순옥씨의「패션·쇼」에 출연한 조혜란양은「개런티」를 요구,「패션·모델」을 직업화하는 최초의 전례를 만들었다.
166㎝의 큰키에 체중 49㎏의 바짝 마른 몸매의 조양은 어느 여배우보다도 효과 있게 옷을 입어냄으로써 직업적인「모델」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그때 그가 받은「개런티」는 3만환(구화)이었다.
『직업적인「모델」이 되겠다는 뚜렷한 결심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옷값 얼마를 깎아주는 식으로 얼버무려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차피「모델」은 직업화 할거라고 알았으니까요.』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백화점에서 일하다가「패션·쇼」에 우연히 출연했다는 혜란양은 그 후 10년동안의 직업의식이 철저한「모델」로 성장했다.
현재 약 50명정도로 꼽혀지는 우리나라의「패션·모델」들은 A「클라스」3만원, B 2만원, C 1만원정도의「개런티」로 일하고 있는데 조양은 5만원까지 받고있다.「패션·쇼」1회 출연료라고 하지만 그 속에는 몇 차례의 가봉, 보도진을 위한 사진촬영, 예행연습의 의무까지가 포함되어 있다.
최근 5, 6년동안「패션」은 기업으로 성장할 만큼 번창햇으나「쇼」를 정기적으로 열 수 있는「디자이너」는 10명내외이며「모델」들의 취업시장은 그 만큼 좁다고 할 수 있다.
봄·가을의「컬렉션·시즌」과「비치·웨어·쇼」가 열리는 여름에는 3, 4차례씩 출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도 하지만 A「클라스」「모델」들의 월 수입은 평균 3만원을 넘기 힘들다.
거기다 상당한 사치풍조와 소비성향이 조장되기 쉬운 직업이므로『직업이라고 내세울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게 당사자들의 의견.
「모델」을 훈련시키고 있는 국제복장학원「차밍·스쿨」과 각「디자이너」들 앞으로「모델」지망의 소녀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고 있긴 하지만 직업으로서의 전망은 밝은편이 아니다.「패션·모델」이 직업으로 유망주가 되는 앞날을 위해서는 여러가지 종류의 수 많은 「전례」가 계속 필요해질 것이다. <장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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