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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여성의 신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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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흔치는 않지만, 만일 어떤 여성이 이론물리에 특별한 재능이 있고, 그 재능을 펼치려는 내적 충동을 느낀다면, 대학 질서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 그리고 언제든지 다시 내보낼 수 있다는 조건 아래 시험적으로 강의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겠다."

청강을 허용하는 데 여섯 가지 단서와 양보 조항을 걸어 놓았다. 191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막스 플랑크가 여성의 대학 입학을 허용하면서 내놓은 입장이다. 20세기 초 여성의 대학 입학 허용은 서구사회의 심각한 논쟁거리였다.

여성은 물리학과 같은 학문적 사고를 할 능력이 없으며, 무리해서 대학을 다니면 근시와 신경질적 정신병 증세를 보이고, 특히 그것이 자식에게 유전될 수 있기에 심각하다는 우려다. 19세기 말 생물학적 지식과 봉건적 사회 질서가 결합된 성차별의 이데올로기다.

현대여성운동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는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The Feminine Mystique)'가 출간된 것은 그로부터 반세기 정도 지난 63년 미국에서다. 여성운동의 고전은 "뭔가 잘못된 점이 있다"는 한 주부의 일상적 체험으로 시작된다.

"여성이 엄마나 주부가 아닌 인간으로서 행동할 때 느끼게 되는 죄책감이란 덫에 나는 걸려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결론은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천국과 지옥을 선택해 만들 능력이 있을 것"이라는 자각이다.

'여성의 신비'란 남성 중심 사회가 만들어놓은 이데올로기로서의 이미지를 말한다. 프리단은 자신이 깨부수고자 하는 미몽(迷夢)을 제목으로 삼은 셈이다. 프리단 역시 집필 과정에서 "신경증 환자"라는 19세기식 비아냥을 들었다.

그러나 설문조사를 통해 "신비스러운 힘과 소명감"을 느꼈기에 5년여 집필 과정을 버텨낼 수 있었다고 한다. 프리단의 딸들은 입술을 단장해야 할 루주로 '우먼 리브(Woman Lib.여성 해방)'란 구호를 휘갈기며 페미니즘의 시대를 열었다.

남존여비(男尊女卑)와 삼종지도(三從之道, 여자는 아버지.남편.아들을 따라야 한다)를 강조하던 우리 사회에서 현대적인 의미의 여성운동이 본격화한 것은 80년대 들어서랄 수 있다.

불과 20여년 만인 올해 신임 판사 자리의 절반을 여성이 차지했다. 성적 우수자들이 지원하는 서울지법에 자리를 얻은 예비판사 34명 중 24명이 여성이다. 여성의 신비는 더 이상 허상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듯하다.

오병상 국제부 차장

<바로잡습니다>

◇2월 19일자 31면 분수대 기사에서 '남존여비'의 '남'자는 한자로 '南'이 아니라 '男'이기에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