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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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세모가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 가두서 울리는 자선남비의 종소리가 아니라도, 확성기 속의 부질 없은 「크리스머스·캐럴」이 아니라도, 우리는 안다. 세모가 하루하루 다가오는 것을-.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설렘, 우리의 마음속에도 부는 바람소리. 우리는 달력의 마지막장을 쳐다보지 않아도 이해가 저물고 있는 것을 안다.
어쩌면 신문의 일자를 확인하지 않아도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물가가 오르고, 불 (화재)이 갖고, 좀도둑이 끓고, 학교마다의 교정에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그리고 신문의 「헤들라인」을 장식한 으스스한 뉴스들, KAL기 납북 사건과 같은-. 대저 이맘때면 12월의 발걸음소리가 어디서 저벅저벅 들리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에게 사계가 주어진 것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느낌도 없지 않다. 우리는 그 계절들을 즐기는 편이기보다는 계절에 쫓기는 생활에서 도무지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녹음이 질 무렵이면 벌써 수재와 한해를 걱정해야하고, 낙엽이 질 때면 월동을 걱정해야하고, 그래서 해가 바뀌면 세금은 오르고, 우리의 새해는 또다시 숨이 차기 시작한다. 꽃은 피는지 마는지, 그렇게 슬그머니 건망증 속에서 봄은 지나가 버린다.
계절은 「자연」이라고 그냥 내버려 둘 것은 아닌 것 같다. 정치의 손은 거기에도 닿아야 한다. 우리가 계절의 기쁨과 신선한 감격을 되찾는 것은 어쩌면 정치의 회복에서 비롯되는 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생활이 너나없이 유복하고 편안할 때 낙엽의 시정도 되살아나며, 겨울의 설경도 멋이 있을 것이다.
거리를 걷는 저 총총걸음들. 저마다 마음을 닫고 창백해 있는 저 「포커페이스」들. 어수선한 거리와 세정들.
그러나 세모에 우리가 알뜰히 닦아야 할 것은 그 마음의 거울이다. 뿌연 먼지들을 닦고 스스로를 돌아 볼 관용의 시간을 찾는 것이다. 미운 이웃을 용서하고, 멀어진 친구에게 문안하며. 앙금처럼 내부에 침전한 회오를 되새기며 모든 것에 잊혀진 의미를 일깨워야 할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반드시 선량하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한 말이다. 인간은 그러나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짊어지고 있게 마련이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이것들은 던져지는 상황에 따라 뒤바뀌기 쉽다. 그러나 그것을 느끼는 편은 언제나 우리들 자신이다. 우리의 상황도 느끼기에 따라서는 절망일수도 희망일수도 있는 것이다.
세모의 설렘 속에서 실로 우리는 자신을 가다듬는 일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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