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중앙시평

21세기의 난생설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북한 헌법은 ‘김일성-김정일 헌법’이다. 헌법 서문에 아예 그렇게 못 박아두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의 주체적인 국가건설사상과 국가건설업적을 법화한 김일성-김정일 헌법이다.” 과문한 탓일까, 아무리 위대한 가문(家門)이라 해도 부자(父子)의 이름이 나란히 헌법의 공식 명칭으로 오른 나라가 또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북한 헌법 서문의 18개 문장 중 11개 문장의 주어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다. 수령의 헌법상 호칭은 ‘민족의 태양’을 비롯해 천재·령장 등 10여 개에 이른다. 나아가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창시한 위대한 수령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높이 모신다”는 다짐까지 담고 있다. 종교적 신앙고백에 가까운 이 다짐이 과연 한 나라의 헌법적 선언인지, 어느 민족 시조의 건국신화인지 도통 구별이 안 된다. 하기야 ‘단군의 자손’ 대신에 ‘김일성 민족’을 자처하는 그들이니 놀랄 일은 아니다.

 철의 장막을 둘러치고 우상처럼 군림했던 스탈린 시절의 소련 헌법에도 ‘스탈린 헌법’이라는 표현은 없었다. 발꿈치를 딱 붙이고 오른팔을 쭉 내뻗으며 ‘히틀러 만세’를 외쳐야 했던 나치 시대에도 히틀러의 호칭은 단지 지도자에 불과했다. 전 세계를 뒤흔든 제3제국의 총통도 ‘게르만 민족의 태양’까지는 차마 넘보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대한민국 헌법에는 어떤 개인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 헌법 전문(前文)의 주어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대한국민’일 뿐이다.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헌법 제10조)를 가지는 우리 체제보다 수령과 령도자의 ‘최고 존엄’을 높이 받드는 북한 체제에 더 솔깃해 있는 남쪽의 어떤 운동가들은 위대한 수령이 축지법과 둔갑술에 능하고 솔방울로 폭탄을, 모래알로 쌀을 만들었다는 공상적 영웅담마저도 ‘사실의 전설적 전환’이라는 논리로 합리화하려 든다. 논리 전개야 저들의 자유이겠지만, 이것은 무슨 이념이나 신조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이성과 양심의 문제일 따름이다.

 2004년 용천역 폭발사고로 인근 소학교의 학생 등 백수십 명이 희생된 직후 북한 중앙통신은 이런 보도를 냈다. “교사 ○씨는 학교 건물이 붕괴되고 불이 나자 3층 교실에 있던 수령의 초상화를 안전한 곳으로 옮긴 후 제자 7명을 구해내고 자신은 숨졌다. 교사 △씨도 초상화를 품에 안은 채 사망했다. 주민들은 가족의 생사 여부를 알아보기에 앞서 가정에 있는 초상화를 안전하게 모시었다.” 아아, 저 머나먼 별들을 왕래하며 우주에 인공위성을 쏘아올리는 첨단 과학 시대에 이토록 가슴 저미는(?) 초현실적 충절(忠節)의 세계가 있다니….

 가족이나 어린 제자들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그 초상화 속 어버이 수령은 육친(肉親)의 부모보다 더 정성껏 받들어야 할 신성불가침의 독존(獨尊)일 터이다. 독재와 독선에는 비판이 따르지만 독존에는 어떤 비판도 불가능하다. 오직 숭배와 복종만이 있을 뿐이다.

 공산주의의 실패를 자인하듯 북한 헌법은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삭제하고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을 헌법정신으로 명기하면서 “김정일 동지께서는 우리 조국을 불패의 정치사상 강국, 핵 보유국, 무적의 군사강국으로 전변시키시었다”는 문구를 추가했다. 비핵화를 수령의 유훈(遺訓)으로 받든다는 세습정권이 드러내 놓고 핵무장을 선언한 셈인데, 헌법에 핵 보유를 명시한 나라가 달리 또 있는지 모르겠다.

 자주와 주체를 외치는 북한의 선군체제는 대한민국의 어느 대통령조차 그 앞에 찾아가 “남측의 어떤 정부도… 북측이 하시는 것처럼 이런 수준의 자주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감복(?)했다지만, 중국과 한국은 물론 철천지 원수 미국에까지 손을 벌리는 북의 현실은 자주와 주체의 구호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위대한 수령은 민족의 태양’이라는 전무후무한 헌법 문구에 따라 수령의 생일은 북한 최대의 국경일인 태양절로 등극했다. 태양처럼 둥글고 커다란 알에서 태어나 나라를 세웠다는 고구려의 주몽이나 신라의 박혁거세도 따르지 못할 아득한 초인(超人)의 성탄절이다. 아무리 21세기라지만, 나는 왜 축지법이나 둔갑술 따위에 어울릴 듯한 건국 시조의 난생설화(卵生說話)가 또 하나 나오지 않는지 늘 궁금하다.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된 지 65년, 헌정사(憲政史)의 갈피마다 선명히 배어 있는 우리 국민의 피와 땀과 눈물, 그 치열한 자유민주의 헌법정신을 세상에 둘도 없는 북한 헌법을 통해 역설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얼마나 슬픈 아이러니인가.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