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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 묘지와 범어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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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일러스트=강일구]

유상철
중국전문기자

얼마 전 적군 묘지를 찾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에 송환 의사를 밝혀 주목을 받았던 중국군 유해 367구가 안장된 곳이다. 6·25 전쟁에서 전사한 북한군과 중국군 유해를 한데 모은 이곳의 공식 명칭은 ‘북한군·중국군 묘지’.

 멀지 않았다.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산 55번지. 사람들의 발길이 그리운 걸까. 37번 국도에 바짝 붙어 있었다. 1묘역과 2묘역을 가르는 작은 밭에선 채소가 비를 머금고 한창 자라고 있는 게 여느 전원의 풍경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어느 군부대에서 훈련을 하는지 멀리 포 소리가 들린다. 전선의 멀지 않음을 실감케 한다. 중국군 유해가 있는 2묘역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흰 꽃다발 하나가 눈에 띈다. 꽃은 강원도 춘천시 서면에서 발견된 무명의 294번 중국군 묘비에 놓여 있었다.

 이달 중순 한·중문화협회의 초청으로 서울에 와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 출신 중에선 처음으로 이곳을 찾은 3명의 중국 노인들이 두고 간 것이리라. 이들은 향을 피우고 꽃을 바치며 “6·25 전쟁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전쟁”이라고 말했다.

 중국 일각에서 한국전쟁을 “정의의 전쟁”이라고 일컫는 것과는 큰 온도 차가 느껴진다. 이들의 방한 소식을 다룬 본지의 중국어 사이트 기사엔 “대단히 고맙다”는 중국인의 댓글이 올랐다.

 지난주 서울에선 한국국제교류재단과 중국인민외교학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제18차 한·중미래포럼이 열렸다. 세미나 일정을 소화한 중국대표단 10여 명이 하루 시간을 내 찾은 곳은 부산 범어사(梵魚寺).

 한국의 사찰, 그중에서도 범어사를 찾는 이유가 궁금했다. 중국대표단은 그냥 “교류 차원”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한국 불교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범어사는 중국대표단과의 교류를 통해 중국을 더 잘 알 수 있지 않겠느냐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필자의 머리엔 티베트 분리독립 문제로 중국과 마찰을 빚고 있는 달라이 라마가 떠올랐다. 3년 전 일본에서 열린 달라이 라마와 한국 불자의 만남에 범어사가 일정한 역할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 소통하는 게 그러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판단을 중국이 했음 직하다.

 한·중문화협회가 한국전쟁 당시 파주까지 총을 메고 왔다는 옛 중국군 병사를 적군 묘지로 초청하고, 또 한·중미래포럼에 참석한 중국대표단이 범어사를 단체 방문하는 두 가지 사안엔 이 둘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

 공공외교(公共外交)의 전개가 그것이다. 공공외교란 매력과 문화 등 소프트파워를 활용해 상대국 국민의 마음을 사 궁극적으론 그 나라의 대외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외교다. 진실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거짓말도 동원하는 선전(propaganda)과 구별된다.

 이달 초 우리 외교부는 중국의 파워 블로거 10명을 초청했다. 이들을 따르는 중국의 팔로어가 9000만 명임을 감안하면 이들이 중국의 민심에 미치는 파괴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22일부터는 중국의 대표적 공공외교 기관의 수장이 한국을 방문 중이다.

 리셴녠(李先念) 전 중국 국가주석의 딸로 시진핑(習近平) 현 국가주석과 막역한 관계로 알려진 리샤오린(李小林)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 회장이 오늘 서울의 한 대학에서 우리 청년들을 대상으로 ‘중국의 꿈(中國夢)’을 소개한다.

 최근 한·중 간에 뜨겁게 펼쳐지는 공공외교 경쟁에 불을 지핀 이는 박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의 지난달 방중 자체가 공공외교의 전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방중 기간 경우에 맞는 고사성어 인용과 장소에 부합하는 입성 등 중국인의 마음을 사기 위한 다양하고도 정교한 공공외교를 펼쳤다.

 시안(西安)의 병마용 관광 시 박 대통령을 발견한 중국인들이 손을 흔들며 환호를 보낼 정도로 박 대통령은 중국인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했다. 정치 리더가 한류 스타 이상의 인기를 얻었다. 중국인의 호감을 산 게 박 대통령의 가장 큰 방중 성과로 꼽힌다.

 박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은 올해 ‘한·중 공공외교 포럼’을 신설하기로 합의하고 이 내용을 공동성명에 못 박았다. 앞으로 양국 사이엔 서로의 마음을 사기 위한 치열한 공공외교가 전개될 것이다. 아니 이미 시작됐다.

 걱정되는 건 우리의 공공외교 준비가 중국에 뒤진다는 점이다. 중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성화 봉송대가 서방의 반(反)중국 시위에 부닥친 걸 계기로 공공외교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2009년엔 공공외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차하얼(察哈爾)학회가 탄생했다.

 또 그해에 중국 외교부 내의 공중외교처가 공공외교판공실로 격상됐다. 이후 중국의 양대 명문인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 모두 공공외교센터를 개설했다. 반면 우리 외교통상부는 2011년 처음으로 공공외교 대사를 임명하고 2012년에야 공공외교정책과를 신설했다.

 한때 축구에서 토털 사커(total soccer)가 유행한 적이 있다. 포지션에 관계없이 전원이 공격하고 전원이 수비하는 형태다. 외교도 이젠 직업 외교관이 전담하던 시대에서 벗어나고 있다. 국민 모두가 외교관이 돼 국격(國格)에 맞는 말과 행동으로 우리의 매력을 세계로 발산해야 하는 시점을 맞고 있다. 21세기 공공외교 시대엔 우리 모두가 외교관이다.

유상철 중국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