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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논쟁 <2>박세일 이사장 '공동체 자유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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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서구의 자유주의 이념과 동양의 공동체 전통을 융합한 ‘공동체 자유주의’를 새로운 보수 이념으로 주창해 온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이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신 후 새로운 보수의 지표로 떠오른 이념이 ‘공동체 자유주의’였다. 보수도 변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반성에서 시작됐다. 좌파적 가치로 여겨진 공동체 이념을 자유주의와 결합시켰다는 점에 새로움이 있었다. 좌파의 장점을 흡수해 우파를 강화하자는 발상이다.

 ‘공동체 자유주의’는 박세일(65)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이 90년대 후반 처음 주창했다. 지난 6월 19일 최장집(70) 정책네트워크 내일 이사장이 진보의 새로운 지표로 ‘진보적 자유주의’를 내세우자 공동체 자유주의도 재조명을 받는다. 최 이사장이 진보적 자유주의를 내세운 시점도 야권이 2007년과 2012년 대선에서 잇따라 패한 이후다.

박 이사장은 “최 이사장이 자유주의를 내세운 것은 아주 잘한 일”이라며 일단 반겼다.

 하지만 자유주의 앞에 붙은 ‘진보적’이란 형용사에 대해선 물음표를 던졌다. 진보는 본래 바람직한 상태로의 변화를 의미하므로 그 자체는 사상성이 없다는 것이다. 무엇을 진보로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진보적 자유주의가 앞으로 그 내용을 올바로 채워주기 바란다고 했다. 그렇게 될 경우 자신의 공동체 자유주의와 최 이사장의 진보적 자유주의는 70%를 공유하고 30%의 차이를 보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두 사람은 오랜 친구 사이다. 70년대 말~80년대 초 미국 유학시절, 조국의 민주화를 걱정하는 마음을 주고받으며 뜻을 같이했던 사이기도 하다. 79년 봄 미국 뉴저지에서 열린 박세일의 결혼식 날, 비교적 멀리 떨어진 시카고 대학에 유학하던 최장집도 당연히 참석했다. 결혼식 행사는 피로연을 빙자한 대한민국 민주주의 세미나 자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발길이 달라진 것은 92년 당시 신한국당이던 김영삼정부에 박세일이 정책 브레인으로 참여하면서부터다. 97년 김대중정부가 들어서자 이번엔 최장집이 정책 브레인으로 활동한다.

 두 사람은 90년대 이후 한국의 보수와 진보 진영을 각각 대표하는 이론가 다. 2000년대 들어 박세일은 산업화- 민주화에 이은 선진화를 보수의 전략으로 제시하며 선진화의 내용을 공동체 자유주의로 구체화하는 데 주력해왔다. 최장집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대안을 모색해왔다. 21세기형 보수와 진보가 그들이 그려온 그림이 다.

 박 이사장은 이념적 정체성 위기에 빠진 야권과 비판세력에게 진보적 자유주의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했다. 한국의 진보세력이 북한 전체주의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은 점이 정체성 위기의 근원이었는데 최 이사장이 그 점을 분명히 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민주당이나 영국의 노동당과 같은 자유주의 정당이 한국에도 나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했다.

 지난해 4·11 총선을 앞두고 박 이사장은 ‘국민생각’이란 정당을 창당해 제3의 정치세력으로 키워보려다 좌절한 바 있다.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뼈아픈 실패’였다. 다시 정치 일선에 나설 생각은 없다고 한다.

 

 - 지난해 좀 힘들었겠다.

 “크게 고생하면서 많이 배우고 많이 반성했다. ‘국민생각’이란 정당을 왜 만들었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있다. 우리 정치가 지역·이념으로 양극화돼 있는 데다 승자독식 구조다. 그래서 우리 정치가 대립·갈등이 너무 팽배한 가운데 국가 전략·정책이 소홀히 되는 게 일상화돼 있다. 그걸 바꿔보고 싶었다. 개혁적 보수, 합리적 진보 세력이 모여 총선에서 제3당으로 등장해 캐스팅보트가 되면 정치 전반을 정책 중심, 국가전략 중심으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왜 실패했을까.

 “두 가지로 본다. 가장 큰 원인은 저 개인 능력과 준비 부족이다. 둘째는 김정일의 사망이 겹쳤다. 2011년 9~11월까지만 해도 제3당에 대한 기대의 분위기가 괜찮았다. 여야 정당과 시민사회 모두 관심을 보였다. 김정일이 12월 사망하며 한국 보수 우파가 긴장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민주당이 한·미 FTA 재협상, 제주 해군기지 계획 철회 같은 과격노선으로 나갔다. 그래서 2012년 1~2월이 되자 우리 사회 전체가 좌와 우로 쫙 갈라졌다. 제3의 정당을 기대하던 바람은 사그라들었다. 소선구제와 남북분단 상황에서 제3당은 어려운 것 같다. 역사에는 실패의 교훈도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다음을 위해 ‘국민 생각: 먼 꿈과 짧은 여정’(가제목)이라는 자료집을 준비하고 있다.”

 - 최장집 정책네트워크 내일 이사장이 제3당의 시동을 걸며 ‘진보적 자유주의’를 내세웠다.

 “최 이사장이 어려운 결단을 했다. 자유주의를 내세운 것은 아주 잘했다. 현재 야당과 비판세력은 정체성 위기다. 한반도에선 지난 70년 가까이 자유주의와 전체주의의 싸움이 진행돼왔다. 한국의 진보 세력은 북한의 전체주의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 오히려 친북 발언으로 국민에게 적잖은 혼란을 줬다. 엄밀한 의미의 진보가 아니었다. 야권의 이념적 정체성 위기도 그래서 생겼다. 그런 상황에서 최 이사장이 진보적 자유주의를 내놓으며 정체성을 정리하는 결단을 한 거다. 자유주의의 주창은 대단히 중요한 선택이고 진전이다. 이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기초 위에서 성장과 분배를 어떻게 조화할 것인가, 또 정부의 역할을 어디까지 할 것인가 하는 정책 논의로 나아갈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된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의 리버럴(미국의 민주당이나 영국의 노동당)이 나올 수 있게 됐다. 비판세력도 대한민국 헌법정신 안으로 들어온 셈이다. 미국 리버럴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기초로 하되 사회의 평등과 분배, 약자와 소수자에게 관심을 갖는 것 아닌가? 이렇게 되면 체제 안에서 국가를 어떻게 운영할지에 대해 생산적 정책경쟁이 가능하게 된다. 지난 시대의 죽은 이념과 싸움할 필요도 없게 된다. 비판세력이 대안세력이 될 수 있는 길도 열리는 셈이다.”

 - 진보적 자유주의를 공동체 자유주의와 비교한다면.

 “진보적 자유주의의 ‘진보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짚어봐야 한다. 진보는 사상이 아니다. 진보는 대개 더 좋은 상태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무엇이 더 좋은 상황이냐에 대해선 사람마다 의견이 나뉜다. 물질적인 진보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정신적인 진보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사회가 더 자유스러워지는 것을 진보로 보는 사람도 있고, 평등해지는 것을 진보로 보기도 한다. 내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진보다. 그래서 서구에선 진보란 표현을 잘 쓰지 않는 추세다. 그 대신 변화라는 표현을 쓴다. 자유주의는 내용이 분명하지만 진보는 내용이 없다. 앞으로 진보의 내용을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확립시켜 나가야 한다. 그런 과제를 잘 풀어간다면 최 이사장의 진보적 자유주의와 내가 말하는 공동체 자유주의의 내용은 70%는 같고, 30% 정도 다를 것이다. 그것은 건강한 차이다.”

 - 90년대 후반 들어 자유주의의 구체적 내용이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이유가 뭘까.

 “이승만·박정희 정부를 주도한 세력에게 주 과제는 북한과의 싸움이었다. 남한에서 자유주의 심화와 확대가 목적이 아니라, 자유주의의 방어 즉 반공이 기본이었던 것이다. 북한보다 경제발전이 뒤졌던 70년대 중·후반까지는 일종의 ‘방어적 자유주의’였던 셈이다. 경제 성장의 산업화가 성공하고 나서 이제 방어적 자유주의 단계를 넘어서게 된다. 민주화의 시대가 본격화된 것이다. 서구의 자유주의가 한반도에 전해지는 것은 19세기 말 개화기 때로 올라가지만, 자유주의의 제도화는 해방 이후 그리고 그 제도의 내실화와 확대심화는 민주화 이후의 과제로 넘어왔던 것이다.”

 -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는 낯선 용어였다. 자유주의를 반공 이데올로기나 신자유주의로 간주하는 이들이 있는데.

 “자유주의에 대한 오해는 대개 냉전의 산물이다. BC 1000년 전 인류의 평균 소득은 요즘 가격으로 150달러였다. 1750년 산업혁명 직전 인류의 평균 소득은 180달러다. 거의 3000년 동안 변화가 크지 않다. 그런데 2000년엔 6600달러다. 250년 만에 180달러에서 6600달러로 뛴 거다. 무엇이 이걸 가능하게 했을까. 그 답이 자유주의의 확대다. 경제적 자유는 시장 확대와 분업의 세분화로 나타나고, 정치적 자유는 사상의 자유로 이어지며 과학기술의 발달을 가능하게 했다. 과학기술 발전과 시장분업의 확대라는 두 축이 지난 250년간 지구촌에 풍요를 가져왔다. 그 속을 관통하는 발전의 원리는 개인의 자유와 창의다. 서구에서 18∼19세기에 일어난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이념적으로 표현한 것이 자유주의다.”

 - 박 이사장도 자유주의 앞에 공동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공동체 자유주의’를 주창한 배경은.

 “자유가 발전의 원리지만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자유로만 흐르면 공동체가 약화된다. 그러면 자유가 지속 가능하지 않게 되고 인간도 행복해질 수 없다. 그래서 공동체를 소중히 하는 자유주의, 즉 공동체 자유주의를 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서양적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하면서 동양적인 공동체주의가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본래가 개체이면서도 공동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 동양적 의미의 공동체란.

 “인간은 관계적 개체다. 행복은 공동체에서 온다. 그게 동양적 인간관이다. 공동체에 관한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있다. 사회적 공동체의 중요성은 모두가 중시한다. 그러나 동양은 역사적 공동체를 특히 중시한다. 동양은 선조들의 좋은 지혜와 전통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후손들에게 전수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또한 동양에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본다. 그래서 자연 내지 생태적 공동체를 중시한다. 또 물질 중심의 분업사회도 중요하지만 정신 중심의 윤리공동체를 더 강조한다. 이러한 동양적 공동체 사상이 세계 발전원리인 자유주의와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공동체 자유주의다. 그래야 국민 통합과 국가 발전을 함께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신자유주의를 어떻게 보는가.

 “서구에서 신자유주의가 등장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많은 나라가 자유방임주의 정책을 쭉 펴다가 1930년대 대공황이 발생하며 사회적 양극화 현상이 심해질 때 두 가지 대안이 나왔다. 하나는 시장을 없애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시장을 그대로 두면서 정부가 개입해 불공정을 개선해 가자는 영국 경제학자 케인스(1883~1946)가 제기한 수정자본주의 방식이었다. 케인스 방식이 30~40년간 세계 흐름을 주도하다 보니 이번엔 정부의 과도한 개입이 문제가 되는 ‘정부 실패’가 불거졌다. 이런 상황에서 1980년을 전후해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위축된 시장 기능을 다시 살리자는 배경에서 등장한 이념이 신자유주의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과도한 개입을 줄이자는 이 이론은 당시로선 필요해서 나온 거다. 다만 일반시장의 독과점 구조를 해소하는 규제완화는 좋았는데, 금융부문의 경우 금융시장의 특수성이 있기에 규제완화를 대단히 신중히 했어야 했는데 그것을 잘못해서 2008년 말 금융위기의 역풍이 불었다. 그렇다고 신자유주의가 다 틀렸다고 말할 순 없다. 아직도 유효한 부분이 있다. 그렇다고 규제완화가 시장만능주의로 질주해서도 물론 안 된다.”

 - 공동체 자유주의를 언제부터 구상했나.

 “1997년 나와 몇몇 교수들이 주도해 만든 ‘안민(安民)정책포럼’의 창립 이념이 공동체 자유주의였다. 21세기형 자유주의라고 불렀다. 개인의 존엄과 창의를 기본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자본주의를 지지하고 집단주의와 전체주의에 반대한다. 시장을 중시하되 독과점에 반대하고 공정·자유·경쟁·질서를 주창한다. 시장에 정부가 개입할 필요가 있으나 정부 실패를 염두에 두고 신중한 개입을 해야 한다는 등의 조항을 두었다. 그 이념을 기초하면서 물질보다 정신이 중요하다 했고, 경제보다 도덕과 문화가 중요하다고 했다. 또 가족과 민족의 문제가 중요하되 세계주의와 조화하기 위해 열린 민족주의를 제시하였다. 그때 같이했던 친구가 최광·강철규·장오현·이성섭·김인철·나성린·정재영 교수 등이다.”

 - 『공동체 자유주의』는 2008년 출간됐는데.

 “그보다 앞서 내가 국회에 있을 때 당시 2005년 야당이던 한나라당의 이념으로도 공동체 자유주의가 들어가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 대표 할 때다. 정당의 목표를 ‘나라 선진화’에 두고 이념을 공동체 자유주의로 한다고 명시했다. 『공동체 자유주의』란 책은 그런 과정을 거쳐 그 이후 체계화돼 2008년 나온 것이다.”

 - 서양에도 ‘공동체 자유주의’가 있나.

 “비슷한 문제의식은 많이 있고 공동체주의라는 말도 있지만 ‘공동체 자유주의’라는 표현과 정확히 대응하는 말은 별로 없다. 비슷한 제목의 논문을 몇 가지 보았지만 주장의 배경이 달랐다.”

 - 현재 우리 사회에서 발전시켜야 할 자유주의 가치는.

 “우선 개인의 존엄성·창의성을 확대시켜야 한다. 그건 다양성의 수용과 세계화로 나타날 것이다. 그다음 중요한 건 법치주의다.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자유여야 한다. 나는 법치주의라는 표현보다 ‘법례(法禮)주의’를 선호한다. 서양의 법치 문화와 동양의 예의 문화를 융합한 개념이다. 전통 유가에서 말하는 예의 원리가 없이 법으로만 다스리면 공동체 구성원의 마음으로부터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자유주의가 자유민주주의가 되려면 반드시 중요한 게 민본(民本)이다. 지도자는 국민을 하늘처럼 섬겨야 한다. 이 같은 동양의 민본주의 전통과 지도자를 직접 뽑는 서구적 민주주의가 함께 가야 한다. 즉 우리나라에서는 ‘민본적 민주주의’가 되어야 자유민주주의가 성공할 수 있다.”

 - 직접 정치에 나설 뜻은.

 “우리나라가 잘되는 방향으로 도울 생각이다. 현실정치는 안 맞는 것 같다. 좋은 후배들 잘되도록 해야지. 최근 국제회의에서 만난 중국 전문가가 ‘한국이 통일할 기회가 빨리 오는 것 같은데, 너의 나라 정치 때문에 통일을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여하튼 나는 앞으로 한반도 통일과 대한민국의 저성장 양극화 문제를 동시에 풀어가는 방향을 더 천착하고 싶다.”

글=배영대·이상화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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