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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의 딸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중공의 문화혁명에서 그들 지도층이 모·임파와 유·등의 두패로 나뉘어 싸운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나 가족들 마저 혈전을 벌인 것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유소기의 경우, 그의 처 왕광미는 물론 아버지와 형도 비판받았고 자식인 유윤야, 유도등은 양친을 공개석상에서 비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모·임 양가는 승자변에서 득의양양이었다.
모택동의 처 강청, 임표의 처 섭군의 활약상은 말할 것 없고 그들의 자식들의 활약상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모택동의 자식들에 대해서는 극히 최근까지도 세상에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는데 강청과의 사이에 난 두딸은 문혁을 통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맏딸 소력(아명=이납)은 지금「해방군보」의 편집책임자이며 둘째딸 이민은 국방과학기술위원회안에서 실권파축출의 급선봉격이다.

<조카도 혁명위에>
또 모의 조카인 모원신은 요령성혁명위의 부주임이다. 모원신은 모택동의 빈제인 모택민(43년 신강석서 사망)의 아들. 임표의 딸 임두두는 공군기관지「공군보」의 기자로 있다. 양가의 딸들이 군의 기관지를 쥐고있는 셈이다.
그런데 해방군보란 문혁의 초기에 당기관지「인민일보」를 제쳐놓고 문혁의 주도권을 쥔 신문인 것이다.
소력이란 귀에 익지않은 이름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작년의 국경일때부터이다. 당시의 인민일보에 의하면 그녀는「해방군의 책임있는 동지」속에 포함되어 서열은 송유(정치학원부원장)의 다음 이었다.

<군수뇌보다 상위|내연때 낳아 성은 강청따라 이가>
그후 약 반년간은 별로 북평서의 집회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금년5월1일의「메이데이」에서는 아버지 모택동과 더불어 해방군을 사열했으며 석차도 장천운총후근부부부장(소장)나순초국방과위부주임(중장)의 사이에 놓여 소경광해군사령관(대장)진사걸공정병사령(상장)등 군수뇌보다는 훨씬 상위에 올라섰다.
모택동의 딸들은 일부러 성을 모가아닌 강청의 결혼전의 이름 이를 사용하고 있다. 맏딸 이납은 1940년 연안에서 태어나 을해 28세인데 아마도 그때는 모와 강청이 아직 정식결혼을 하고있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2년후에 동생 이민이 태어났다.
1945년부터 46년에 걸쳐 모택동이 연안의 자택에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을 때 이들 두딸은 언제나 모의 곁에서 상해어와 호남방언을 섞어가며 재롱을 떨었다는 것이다.

<소설공부한 전력>
1957년께부터 이납은 정치적소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스탈린」문학상을 탄 이름난 여류작가 정령을「반공산주의 분자」라고 비난한 청년애학자의「그룹」에 끼어었었다. 이납의 비난문은「문화보」에 대대적으르 공표되어 있었으나 모의 딸이란 점에는 언급이 없었다. 이납은 그때까지 정령의 지도로 단편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정령이 그녀에게 문학적명성을 추구하도록 그를 지도했다는 것이다.
그후 이납은 북경대학에서 4년간 재학, 문혁2년째인 67년10월에는 대학안의「반혁명분자」를 조사하고 나섰다.
요문원이 문혁을 통해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는것도 그녀의 남편이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아직은 확인되지 않았다. 최근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동생 이민은 소형봉원수의 국방과학기술위원회주임으로서의「죄상」을 폭로한 9인의 젊은 간부중 한사람이다.

<문혁후에야 각광|임표딸도 기자로>
막형진은 중공의 핵「미사일」개발의 최고책임자인데 그를 이민이 공격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평온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한편 임표의 처 섭군은 문혁때까지는 전혀 무명인이었다. 66년11월28일 북평서 개최된 문예계의 문혁대회석상에서 강생의 처 조질구와 더불어「데뷔」, 군문혁소조가 개조되었을때매 9명가운데 6번째로 승진했다.
그의딸 임두두는「공군보」의 기자로「향양화개」라는 글을 발표하는 등 필명을 떨치고 있다는 것이다.【JNS=본사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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