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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에게 맞고 자녀에 외면 당해도 '집안망신'으로 여겨 쉬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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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과 둘째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이모(66)씨는 오랫동안 남편(73)에게 폭행을 당해왔다. 그러나 지적장애 1급인 딸은 아버지를 말릴 힘이 없었고, 이씨도 치매를 앓고 있어 남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인근 지역에서 실습 중이던 양보호사 실습생이 이를 발견해 노인보호 전문기관에 신고했고, 이씨는 따로 살고 있는 첫째 딸 집으로 거처를 옮겨 가까스로 남편의 학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지난 2006년 아내를 잃고 아산에서 혼자 거주중인 강모(86)씨는 최근 극도로 몸이 쇠약해졌다. 원래 뇌졸증 당뇨 등 심한 지병을 갖고 있는데다 최근에는 합병증까지 걸려 몸 상태가 더욱 좋지 못하다. 하지만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슬하에 6남매를 두고 있지만 서로 연락이 끊긴지 오래다. 매달 지급되는 연금이 있긴 하지만 생계에 큰 도움이 되는 액수는 아니다. 견디지 못한 강씨는 이웃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웃은 아산에 있는 충남노인보호 전문기관에 이를 알렸고 그들의 도움으로 강씨는 얼마 전 인근 노인요양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다.

노인학대가 전국적으로 매년 증가하면서 개선책 마련이 절실해지고 있다.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에 따르면 현재 전국적으로 자신의 가정에서 학대 받고 있는 노인은 80여 만명으로 추정된다. 전체 신고건수는 지난해 9340건으로 2011년 8603건보다 8.6% 증가했다. 지난 2005년부터 매년 평균 15% 정도 증가하고 있다.

 천안아산 지역도 예외가 아니다. 충남도 전체의 노인학대 신고건수는 지난해 199건. 2011년 116건 보다 80% 정도 증가한 수치다. 천안 아산 지역은 지난해 신고건수가 78건으로 충남도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노인 ‘자기방임’ 학대 급증

문제는 고령화와 빈곤화로 인해 노인 학대가 갈수록 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피해자들이 학대 받은 사실을 숨기려고 한다는 것. 피해자 대부분이 ‘자녀와 배우자라는 점’ 때문에 ‘자녀에게 피해가 갈까봐’ 혹은 ‘집안 망신’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산경찰서에 접수된 노인학대 신고는 매년 10건도 되지 않는다.

 아산경찰서 관계자는 “노인학대는 대부분 가정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사법기관을 통한 신고를 꺼려한다”며 “신고를 하더라도 일이 커질까 두려워 고소를 취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역의 여러 단체들과 연계해 지속적으로 학대 받는 노인들이 있는지 파악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이 공개한 ‘2012년 노인학대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가해자 대부분은 이씨의 경우처럼 배우자와 자녀 등 가족인 경우가 86.9%에 달했다. 가해자 중 ‘아들’이 41%로 가장 많았다. 특히 학대를 받은 노인은 여성(69.1%)이 남성에 비해 2배 이상 높았다. 피해자들은 배우자가 없고(62.7%), 학력이 높고, 소득 수준이 낮을수록 학대 받을 위험이 더 컸다.

 또한 전국적으로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60세 이상 노인인 일명 노노(老老) 학대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2011년 944명이던 60세 이상 가해자는 지난해 1314명으로 39.2% 늘었다. 노인 스스로 식사도 거르고 의료 처치도 받지 않는 ‘자기방임’ 학대도 2011년에 비해 101%나 급증했다.

 특히 천안아산지역에는 강씨의 사례처럼 (자기)방임 학대가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천안아산 전체 신고건수의 40%(충남 25%)가 (자기)방임 학대로 조사됐다. 이는 천안아산지역이 아직까지 농촌지역이 많고 자녀들은 대부분 서울이나 수도권 등 타지에 머물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김원천 충남도노인보호전문기관 관장은 “천안아산의 경우 충남도 13개 시군 중 인구가 가장 많기 때문에 노인학대의 신고건수도 가장 높다”며 “특히 노인학대의 유형 중 자기방임 학대의 경우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데 이는 타 지역과 달리 천안아산지역이 도농복합도시이기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다양한 개선책으로 피해 줄여야

노인 학대 문제는 곪아터져야 밖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해자가 가족이다 보니 신고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노인들이 많다. 정부도 신고율을 높이기 위해 노인학대 예방교육을 의무화하고, 사회복지사 등 신고 의무자의 직무 불이행에 대한 과태료를 부과하는 등 제도 개선을 추진하기로 했다. 또 시·도별로 2개씩 노인보호 전문기관을 확충하고, 상담인력을 충원해 피해 노인을 가해자로부터 일시 격리하는 전용 쉼터 운영을 내실화할 계획이다.

 또한 전문가들은 숨겨진 학대 피해 사실을 조기에 발견하는 것이 학대 피해를 줄이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김 관장은 “학대 받는 노인들이 자녀가 혹은 배우자가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는 등 2차적 피해 때문에 신고를 꺼리는데 이는 오히려 단순 사건을 중범죄로 만드는 계기가 된다”며 “독거노인이 힘들게 살고 있거나 노인 학대 의심이 가는 경우 이웃들이 이를 노인보호전문기관에 신고를 해야한다”고 말했다.

 올해 초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발표한 ‘여성 노인의 안전 실태 조사’에서 한 전문가는 “특히 여성 노인의 학대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조기 발견과 사후관리가 철저히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독거노인, 치매노인, 와상노인 등 학대 위험군과 치매, 잠재적 위험군 그리고 현재 학대 행위를 하는 집단을 지역 내 정신보건센터와 연계해 모니터링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와 함께 이장·통장, 부녀회 등 지역사회 단체들이 주변의 노인들이 학대를 받고 있는지 지속적인 관찰을 하고 신고할 수 있도록 ‘노인지킴이단’으로 활동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조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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