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파공산국 루마니아|닉슨 맞는 「친서구」의 어제와 오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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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른봄, 눈 덮인 「카페이디안」 산맥에서 녹아 내린 물줄기가 분류를 이루어 서부「루마니아」로 유입되고 이 강줄기는 여러 마을을 지나 「에게」해에 흐른다. 곡식은 부족하고 식수는 불량하다. 국민들은 정부가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에 관심을 갖고 바라보고 있을 때 「루마니아」의 공산정권은 재빨리 이에 대응했다. 「헝가리」의 국경 가까운 「오라데아」읍은 인구가 11만인데 그중 반수가 거리에 줄을 이었고, 때마침 이 소읍의 역에는 「부카레스트」에서 온 열차가 멈추려는 순간이었다.
환영의 깃발이 물결쳤고 환영군중들은『사·트레이아스카』 (만세!)를 소리높이 외쳤다. 그때 열차의 승강구서는 작은 키에 어깨가 딱 벌어진 녹색의「레인」코트를 입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닌 한 사나이가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서방에 원조요청>
이 사나이가 바로「루마니아」공산당의 지도자이며 동구의 공산권중 가장 젊은 정치가인 「니콜라에· 차우세스쿠」(51) 이다. 그는 한때 서방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호소한 적이 있다. 『우리들은 지금 전진하고 있다. 보다 훌륭한「루마니아」의 건설을 위해서「루마니아」에의 서방세계의 원조를 원한다.』「차우세스쿠」는 1965년3월 전후 일관해서「루마니아」최고 지도자의 지위에 있던「게오르게·게으르규·데지」가 페염으로 사망한 뒤를 이어 권좌에 올랐다.
오늘날 공산세계에는 세 가지 형이 있는데 소련·중공등과는 달리 동구의 공산권 국가들은 군사적 경제적으로 매우 부드러운 노선을 취하고있다.
「루마니아」의 수도 「부카레스트」의 번화가 「보우레바드·마개루」는 화려한 점포와 번창하고 있는 사무실 건물로 메워져있으나 교통은 한산한 편이다.

<거리풍경 서구적>
「루마니아」에서 자가용을 갖고 있는 인구는 1만명에 불과하다. 거리의 구조와 아름다움은 대체로 서구적이다. 이래서 예부터 수도 「부카레스트」는 『발칸의 파리』『동구의 파리』라 일컬어졌다.
동구공산제국이 소련의 지배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 것은 「니키타·흐루시초프」가 소련의 20차 전당대회에서「스탈린」을 격하한 1956년께이다.
1958년 5만5천명 소련군은 14년간을 진주해있던 「루마니아」에서 철수했고 61년 중공소분쟁 후「루마니아」 는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루마니아」는 소련이 동구공산권을 소련경제의 하청업격이라 할수 있는「코메콘」(경제상호 원조회의)에 가입하도록 압력을 받고도 완강히 반대한 나라이다.

<소서는 자원노려>
소련은「루마니아」가 그들의 풍부한 자원인 천연「개스」를 소련등에 계속 공급하고 공산세계 안에서의「빵바구니」 가 되기를 원했으나 이를 모두 거절했다.
「루마니아」는 그 이름에서 풍기듯 옛날의「로마」 제국과 관계가 있다. 그 옛날 이 지방에 들어온 「로마」인과「다키아」인의 혼혈민족이 오늘의「루마니아」인의 선조이다.
「루마니아」의 제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들어선 것이 1947년12월이다.
48년2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합동 통일노동자당을 조직했으며 「데지」가 제1대서기장이 되었다.

<동서화해에 일역>
제2대 서기장인 「차우세스쿠」의 경력은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양화공의 아들인 그는「부카레스트」의 서북쪽에 있는 농촌「스코니세스티」에서 태어났다. 「차우세스크」의 학교교육은 아주 빈약하며 실제적 교육은 16세때 청소년 조직책으로 공산당에 가입하고서부터이다.
동·서문해빙「무드」에 접어들고 있는 오늘날「차우세스쿠」가 이끄는「루마니아」의 갈 길은 어딘지-.<1966년3윌18일 자「타임」지의 「루마니아」 특집에서 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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