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인간이니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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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호 25면

프란츠 스타이너의 ‘인간과 로봇 간의 사랑’(2007).

기원 후 117년에 로마제국 14번째 황제로 하드리아누스가 취임한다. 당시 알려진 지중해 주변 세상 모두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로마인들은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의 바다를 단순히 “Mare Nostrum”, 그러니까 “우리 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황제로선 처음으로 그리스 철학자 같은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하드리아누스. 그의 그리스 사랑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황비 사비나와 합방하지 않았던 그가 어린 그리스 소년 안티누스와 연인 사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렇다. 중년의 하드리아누스는 어리고 아름다운 소년 안티누스를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김대식의 'Big Questions' 사랑은 왜 해야 할까

시끄럽고 복잡한 로마를 피해 평생 제국 곳곳을 떠돌아다녔던 하드리아누스 옆엔 항상 그의 사랑 안티누스가 있었던 것이다. 요즘 같아선 아동 성추행자로 체포되었을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안티누스는 이집트 나일강에 빠져 익사한다.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황제의 사랑을 듬뿍 받던 소년을 질투한 암살이었을까? 아니면 어린 나이에 밤마다 냄새 나는 늙은이와 잠을 자야 하는 치욕을 견디지 못한 자살이었을까? 훗날 역사가들은 떠나간 안티누스를 그리워하던 황제가 마치 “여자같이 울었다”고 한다. 원로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제는 죽은 연인을 신격화하고 ‘Antinopolis’라는 도시를 세워 신으로 숭배하게 한다.

그리운 연인의 얼굴을 하루라도 보지 않곤 살 수 없었던 늙은 황제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박물관에서 그리스-로마 문명 그 어느 인물보다도 한 시골 소년의 얼굴을 더 자주 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랑은 과연 무엇일까? 사랑이 무엇이기에 평범한 소년이 제우스와 아테네 옆에 당당히 신으로 설 수 있었던 것일까?

페르시아 화가 레자 아비시(Reza-e Abbasi)의 ‘두 연인들’(1630). 페르시아인에게 사랑은 세상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었다.[위키피디아]

아름답고 어린 엘로이즈(Heloise)의 가정교사였던 철학자 아벨라르(Petrus Abelard·1079~1142) 역시 사랑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기 시작한다. 로마제국 멸망 후 중세기 철학은 보이지는 않지만 완벽하다는 플라톤의 ‘저 세상’ 위주였다. 단순히 플라톤의 제자로만 알려졌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아비체나(Avicenna), 아베로에스(Abu I-Walid Muhammad bin Ahmad bin Rusd) 등을 통해 드디어 유럽에도 널리 알려지자 지식인들은 충격에 빠진다. 불확실하지만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역시 단순한 설득과 믿음이 아닌 ‘논리’라는 생각의 도구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전문가였던 아벨라르는 생각했다: 인간의 욕망과 행동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만물을 창조한 신이 시시콜콜한 우리의 모든 행동을 좌우할 리는 없다. 그렇다. 인간에게는 ‘의도’라는 것이 있으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다. 인간은 자유롭다.

자유로운 엘로이즈는 별을 사랑했고, 자유로운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를 사랑했다. 사랑은 아이를 만들었고, 케케묵은 파리의 골목길보다 청청 하늘을 더 사랑했던 그들은 아이에게 별자리 측정에 사용되었던 ‘Astrolabe’라는 기계를 연상해 ‘아스트로라베’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자신을 가정교사로 채용했던 엘로이즈 삼촌의 눈을 피해 이들의 사랑은 시작되었고, 임신을 한 조카와 가정교사의 관계를 알게 된 삼촌은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 조카를 수녀원으로 보낸 삼촌은 아벨라르를 납치해 거세시켜 버린다. ‘끝’이길 기대했던 삼촌의 바람과는 달리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진정한 사랑은 이제야 ‘시작’되었던 것일까? 평생 서로를 다시 볼 수 없었던, 더 이상 자유롭지도 않은 수녀와 수도사가 된 그들이 주고받기 시작한 편지들은 그들만의 변치 않는 사랑, 그리고 인간의 변치 않는 자유를 보여준다.

인간의 섹스는 거의 그로테스크한 코미디
사랑이란 어쩌면 잘랄루딘 루미(Jalal ad-Din Muhammad Rumi·1207~1273), 사디 시라지(Abu-Muhammad Muslih al-Din bin Abdullah Shirazi·1210~1291) 같은 페르시아 시인들이 말했듯 우주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인지도 모른다. 의미 없이 던져진 이 세상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하늘과 신을 경험할 수 있는 잠깐의 순간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랑은 생물학적으론 지극히 단순하다. 무성 생식으로 번식하는 단세포나 박테리아와는 달리 대부분 동물들의 번식은 유성 생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정자와 난자로 분화된 배우자들의 생식 세포들이 융합되어 새로운 생명체의 기반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지구에 존재하는 생명체 사이엔 무성 생식보다 유성 생식이 압도적으로 더 많은 것일까? 섹스란 도대체 왜 존재할까? ‘유전적 다양함을 위한’ ‘생존에 가장 유리한 유전을 골라내기 위한’ 또는 ‘망가진 DNA를 수선하기 위한’ 등 다양한 이론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왜 그렇게도 많은 시간, 땀, 에너지가 투자되는 방법을 통해 번식해야 하는지 모른다. 유성 생식 그 자체의 기원이 미스터리라면, 인간의 섹스는 거의 그로테스크한 코미디에 가깝다.

사회생물학자들이 주장하듯 수억 개의 정자를 언제든지 쉽게 만들어내는 수컷과 달리 수개월의 투자를 통해야만 번식할 수 있는 암컷의 생식 전략이 다를 수밖에 없다. 젊은 여자들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수컷들은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전 총리뿐만이 아닐 것이다. 또 암컷(많은 여성 포함) 역시 자신의 막대한 생물학적 투자를 보호해 줄 남성의 돈이나 권력에 끌리는 것은 당연하다.
크고 살찐 벌레를 물고 와야만 짝짓기해 주는 암컷 새와 같이 여자친구 생일에 명품 백을 선물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다. 하지만 번식 뒤 바로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야 할 인간의 수컷은 왜 남편이 되어 가족을 지키고 자식들을 위해 헌신할까? 집단에 새로운 우두머리가 된 사자는 전 우두머리의 자식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임신 중이던 암컷들은 유산을 유도하는 호르몬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버림받은 인간의 암컷은 그 누구보다 강한 ‘어머니’가 되어 자식들을 보호한다.

섹스는 호모사피엔스들 간 유성 생식의 시작이지만, 우리들의 지속된 번식은 사랑을 통해 가능해진다. 단순한 생물학적 욕망으로 시작한 관계는 도파민, 세로토닌 등을 뿜어내는 뇌 덕분에 상대에 대한 매력과 끌림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욕망과 끌림은 지속적일 수 없다.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 서서히 생산됨으로써 단순한 끌림은 애착과 ‘정’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나, 그리고 너, 그리고 우리의 유전, 그리고 우리 뇌의 호르몬들 간의 치밀한 바통 물려 주기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인간이 하는 그 무엇보다도 사랑이 더 어렵고 복잡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사랑해야 할까? 우주의 모든 지식은 이미 존재하는 절대 지식의 재발견이라고 생각했던 플라톤이었기에, 그에겐 절대 사랑의 대상 역시 이미 정해져 있었다.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주장했듯, ‘남자-남자’ ‘여자-여자’ ‘남자-여자’ 같은 두 개의 머리와 내 개의 팔다리를 가졌던 우리들의 조상은 제우스에게 도전하다 두 동강이가 났다는 것이다. 제우스는 머리 하나와 두 개의 팔다리를 가진 반쪽 인간들을 시간과 공간에 흐트러뜨렸고, 인간은 그 후 잃어버린 또 하나의 ‘나’를 찾아 헤맨다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사랑은 언제나 재발견일 뿐이고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우리는 사실 꿈에서 그리는 ‘또 하나의 나를 사랑해’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는 또 다른 ‘나’의 존재는 확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완벽한 또 하나의 ‘나’를 만날 수 없는 우리는 그래서 완벽할 수 없는 ‘너’를 사랑해야 하기에, 쇼펜하우어가 인간의 사랑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했던 것이다.

로봇 연인 겪으면 사람을 사랑할 수 없으리
그렇다면 ‘나’는 나만 사랑하고, ‘너’는 ‘너’만 사랑하면 되지 않을까? 지속적으로 발전 되는 과학기술 덕분에 늦어도 2050년께엔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로봇들이 만들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인터넷이 야동과 포르노 덕분에 대중화될 수 있었듯, 인간다운 로봇은 제일 먼저 우리들의 욕망 만족에 사용될 것이 분명하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A.I.’에서 중년 여성들을 만족시켜주는 플레이보이 로봇 ‘지골로 조’가 그러지 않았던가? ‘로봇 연인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인간은 다시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고. 당연한 말이지 않을까? 월요일엔 귀여운, 화요일엔 지적인, 수요일엔 아름다운 연인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실망과 그리움이란 없어지고 슬픔과 질투라는 단어는 무의미해진다. 대화를 하고 싶으면 끝없이 할 수 있고, 귀찮아지면 ‘OFF’ 단추를 누르기만 하면 된다. 나의 행동은 그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으며, 나는 그 누구의 행동에도 상처받을 필요 없다.

인간의 역사는 어쩌면 생산자와 소비자의 역사라 할 수 있겠다. 먼 옛날 우리는 언제나 생산자이며 소비자였다. 배가 고프면 사냥을 하고, 동물의 껍질을 벗겨 불을 피워야만 먹을 수 있었다. 시간은 지나고, 문명과 기술의 발전 덕분에 우리는 생산하지 않고도 대부분의 욕망을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배가 고프면 냉장고를 열어 원하는 것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바로 그것이 우리 다음 세대 사랑의 모습이지 않을까? 더 이상 노력도, 그리움도, 실망도, 질투도 없이, 잘 꾸며진 UI(User Interface: 사용자와 컴퓨터 간에 의사소통을 하는 중계화면)를 통해 오늘밤 연인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리움도, 질투도, 실망도 없는 사랑이 여전히 사랑일까?
사랑은 왜 해야 할까? 우리가 바로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김대식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을 했다. 이후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낸 뒤 2009년 말 KAIST 전기 및 전자과 정교수로 부임했다. 뇌과학·인공지능·물리학뿐 아니라 르네상스 미술과 비잔틴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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