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비는 '돌부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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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박인비(오른쪽)가 1일(한국시간) 열린 LPGA 투어 US여자오픈 최종 라운드 마지막 퍼팅을 마치고 우승을 확정하자 유소연(앞쪽) 등 동료들이 샴페인을 뿌리고 있다. [사우샘프턴(뉴욕) AP=뉴시스]

“외부의 자극(이야기)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져라.”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US여자오픈 개막을 앞둔 지난달 27일(한국시간). 박인비(25·KB금융그룹)는 5년째 심리 지도를 받고 있는 조수경(조수경스포츠심리연구소 소장) 박사와 통화하며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박인비는 “나도 귀를 열고 살기 때문에 기록 도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부담이 컸다”며 “그러나 상담을 하며 이번 대회 역시 숱한 메이저 대회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2개 대회에서 연속 우승했으니 한 주 정도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부담을 던 박인비의 플레이는 경쟁자를 압도했다. 첫날 1타 차 단독 2위에 오른 박인비는 둘째 날 2타 차 단독 선두로 치고 나갔다. 셋째 날에는 타수가 4타 차까지 벌어졌다. 최종 4라운드 챔피언 조에서 경기한 김인경(25·하나금융그룹)은 박인비를 추격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3타 차까지 근접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10번 홀이 끝났을 때 이미 승부는 6타 차. 오히려 우승 경쟁보다는 2~3위 다툼이 더 치열했다.

 박인비의 활약상에 미국 골프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AP통신은 “미국골프협회(USGA)가 핀 위치를 매일 어렵게 바꿔 선수들을 괴롭혔지만 박인비에게는 편안한 안방 같았다. 그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역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고 극찬했다.

 박인비가 63년 만에 이룬 메이저 3연승은 남자 골프계로 범위를 넓혀도 1953년 벤 호건(미국) 이후 60년 만에 나온 대단한 기록이다. 박인비는 특히 지난해 7월 에비앙 마스터스 우승 이후 이번 대회까지 24개 대회에서 8승을 포함해 열여덟 차례나 톱10을 기록하는 초강세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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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인비가 원래 긴장감에 잘 대처했던 것은 아니었다. 박인비는 지난해 LPGA 투어에서 2승을 했지만 준우승도 여섯 차례나 했다. 그러나 꾸준한 멘털 트레이닝을 통해 실패의 경험을 긍정적인 효과로 바꾸는 ‘회복 탄력성’이 좋아졌다. 조수경 박사는 “박인비는 실패와 성공 경험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어떻게 펼쳐나가야 할지 비로소 알게 됐다”고 말했다. J골프에서 LPGA 투어를 해설하는 임경빈 위원은 “지난해 여러 번의 준우승 경험이 박인비를 더 강하게 만든 것 같다 ”고 했다.

 박인비의 심리적인 안정감은 골프와 일상생활이 조화를 이룬 데서 나왔다. 중학교 1학년 때 미국 유학길에 오른 박인비는 골프와 공부를 병행했다. 언어 문제도 없고 미국 문화에도 익숙한 것이 다른 한국 선수들과 차별되는 강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2011년 말 약혼한 프로골퍼 출신 남기협(32)씨의 외조를 받아 투어에 전념하는 것도 심리적 안정에 보탬이 되고 있다는 평가다.

 박인비는 이번 우승으로 캘린더 그랜드 슬램(한 시즌에 4개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을 꿈꾸게 됐다. 브리티시 여자오픈과 제5의 메이저로 추가된 에비앙 챔피언십 중 한 개만 우승하면 여자 선수 최초로 캘린더 그랜드 슬램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박인비는 “기록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내 플레이를 할 뿐”이라고 했다. LPGA 투어 통산 72승을 거둔 안니카 소렌스탐(43·스웨덴)은 “박인비는 지금도 계속 발전하고 있다. 그게 정말로 무서운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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