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담은 2000년 전 포도주 항아리처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29호 23면

명암 대비가 강렬한 흑백 사진 속에 다양한 크기의 뚜껑이 달린 병들이 모여 있다. 고대의 토기 같지만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분명 와인 병의 레이블로 사용했으면 와인과 관련된 것이련만, 눈으로 보고도 확신할 수 없는 신비함과 기묘한 분위기가 공존하고 있다. 과연 어떤 진실이 담겨 있는 것일까.

김혁의 레이블로 마시는 와인 <17> 오르카(ORCA)

남프랑스의 프로방스를 대표하는 루베롱과 벙투 산 주변의 보클뤼스 지역에서는 오래 전부터 와인을 생산해 왔다. 그 역사는 2000년 전 프랑스 초기 와인 재배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서 고르드(Gorde) 같은 오래된 프로방스 마을에서는 초창기에 와인을 담기 위해 사용했던 작은 진흙 항아리, 즉 암폴라(amphore)가 지금도 원형 그대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암폴라의 라틴 이름이 오르카(ORCA)다. 한 지역의 와인 역사를 대변해주고 있는 이 옛 항아리를 현대의 와인 병 레이블에 사용하기로 한 것은 자신들의 와인 역사를 보여주려 했던 양조장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레이블의 와인은 프로방스에서 가장 많은 양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는 마르농(Marrenon) 양조 회사가 한정적으로 생산한다. 마르농 양조장은 36개의 생산자들이 연합해서 만든 회사다. 보통 이런 연합 회사들은 양으로 승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회사의 와인들은 각 와이너리들의 포도밭 관리를 다르게 하고 유니크한 포도밭들을 따로 관리함으로써 품질을 유지하고 있다.

벙투 산의 높이는 1911m나 되기 때문에 그 밑으로 크고 작은 구릉들이 수없이 펼쳐져 있다. 구릉 곳곳에 숨어 있는 작은 마을들은 그들만의 와인을 전통방식으로 만들어 왔다. 오르카의 경우도 보클뤼스 지방의 벙투 주변에 60년 이상 된 그레나슈와 시라 나무에서 생산된 포도만 사용하기 때문에 레이블 위쪽에 비에일 빈(Vielles Vignes: V.V 오래된 포도나무)이란 표기를 하고 있다.

보통 프로방스 지방에 부족한 것이 물이다. 이를 주제로 한때 인기를 얻었던 이브 몽탕 주연의 영화가 ‘마농의 샘’이었다. 오래된 포도나무가 자라는 포도밭에는 땅속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물이 많다. 이들을 찾아 뿌리가 아래까지 내려간다. 또 오래된 포도밭은 해발 고도가 높아 프로방스의 강렬한 햇볕에도 불구하고 밤에는 선선한 기운이 감돈다. 덕분에 포도는 깊고 진한 색을 갖고 있으며 은은한 담배 향과 더불어 잘 익은 붉은 과일 향이 긴 여운을 남긴다.

와인을 구성하는 품종은 그레나슈와 시라인데 매년 두 품종의 브랜딩 퍼센트가 달라 그때마다 오르카 시리즈(ORCA I, II, III 등)로 달리 표현하기도 했지만 너무 복잡해 지금은 하나로 통일했다.

와인 레이블을 어떻게 만들지 많은 고민을 하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던 직원의 작품을 활용하게 됐다고 한다. 오리지널 사진을 찍은 직원의 이름은 너무 오래되어 아쉽게도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그는 이 지역 작은 마을의 지하 저장고에서 오르카를 발견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겨 놓고 싶었던 것 같다.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 등불을 밝혔을 때 최초 발견자는 온전한 암포라의 모양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떨렸을까. 그는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고 최초 와인의 향기를 맡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이런 느낌을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던 것 아닐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