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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벗 「아이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제2차대전총결직후인1946년초여름,군인의 신분으로 잠깐 우리나라를방문한것을 비롯 모두3번 방한했던 「드와이트·D· 아이젠하워」 대통령은역대미국대통령중 으뜸가는 친한파적 인물이었다.
그해 5월15일 「아이젠하워」 는 미육군삼모총장의 자격으로 「하지」 중장지하의 미군을 시찰하기위해 내한 단, 2시간을머물렀기때문에 이사실은거의 기억되지않고 있다.
「아이젠하워」 가 미국제34대 대통령에 공화당후보로 출마했던 1952년은 「한국전쟁』 이 미국대통령선거전에서 중대한쟁첩으로 「클로즈업」된해이었다.
「아이크」는 그가 당선되면 취임에 앞서 한국을 방문, 『전쟁을 종결시기는 방법을 발견도복 하겠다』 고 공약했다.
전쟁강화엔 반대
그선거전에서 승리한「아이크」 는 그의 공약대로 52년12월2일에서 5일까지 4일간 우리나라를 방문했다.이른바 1차공식방한이다.그는 방한중 당시의 이승만대통령과함께 초한을 무릅쓰고 전선을 시찰했으며수도사단의 기동연습을 참관했다.
이때이승만대통령은 『침략세력을 한국에서서 추방하기 위해 전면 총공격』합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아이크」 의 심정은 소규모의 제한된 공격으로는 한국전을 끝낼수없다고 판단,휴전하는방향으로 기울어져있었다. 「아이크」 는 당시의 미국 조야에 있어서 누구보다도공산주의의 위협을주창하고 『한국전의 휴전』을 성립시켜야 한다고 강조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역사상 네번째로 피해가 많은것으로 알려진 한국전을 종식시키는데 외교적노력을 다했다.
한 군사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전이 발발한지 2년여만에 미군은 사망2만1천,부상9만1천.행방불명1만3명을 기록하고있었다.
경제재건을 지원
「아이크」 외 친권전 방한이 한국의 지도자를 비롯해서 전쟁조건과 지형을 정확히 인식하는데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워싱턴」 으로 돌아간 그는 한국전을 『명예스러운 휴전』 으로 이끌기위해 방한의 체험을 근거로 새로운 계획과 정책을 전개해 나 갈 수 있었다고 「아이크」는 그의 한저서에서 실토하고있다.
「아이크」의 노력은 「휴전」쪽으로 기울고 대신한국군은 46만에서 52만5천으로 증강, 2개사단을 신설토록 군사원조의 증가를 승인했다.
이조처는 한국육군20개사단의 창설을 목표로한단계적 조처로서 14개사단의 창설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결국 한국전의 휴전협정이 53년7월27일 조인되고 말았다.
「아이크」의 제2차공약방문은 1960년6월19일∼20일에 실현되었다.
그의 제2차방한은 한미우호친선관계의 증대, 그리고 반공국가로서의 유대를 강화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28시간15분간에 걸친 ?한 중「아이크」는 한미 수뇌회담, 국회에서의 연설을 통해 반공전선에 앞장서고 있는 우리민족의 사기를 북돋워줬다.
당시 중공이 금문교를 연일포격하는등 극동의 긴장상태가 고조되었을때여서서 정치면에서뿐아니라 군사적으로도 큰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친선을 위한 방한도
「아이크」는 20일하오3시 우리나라 국회서의 역사적연설을 통해『본인은 미국이 귀국과 상호방위조약에서 공약한대로 대한민국을 지원할 것을 엄숙히재확인한다.』고 재차 다짐했다.
그리고 그의 이한에앞서 발표된 한미수뇌공동성명에서는 특히 다음의 제점이 강조되었다.
한국과 미국간의 우의와 긴밀한 협조의 강력한 유대를 인상적으로 재확인하고
미국은 한국의 통일에 대한 한국민의 깊은 갈망을 인정하고
「유엔」의 정회원이 되도록 미국이 지원하고
미국의 계속적인 경제원조가 한국의 경제발전을 유지하고 가급적조속한 시일내에 경제자립은 성취하도록 돕는다.
당시 한국측은 61년에서 63닌까지 3년간은매년 2억1천만「달러」의원조가 필요하다는 점을역설했었다.
특히「아이크」의 2차방한매 백만의 환영인파에 눌려 그의「퍼레이드」가 중단되었던 그날을 그는 저세상에서도 잊을수 없으리라I-. <이상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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