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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누아르 부활의 두 지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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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스타 류더화(劉德華.42)와 량차오웨이(梁朝偉.41)는 언뜻 보면 불과 물 같다. 류더화가 손짓.발짓을 섞어가며 요란스럽게 말하는 동안 량차오웨이는 고작해야 콧수염을 살짝 만지며 사념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짓는다.

활기찬 아버지, 자상한 어머니 이미지다. 둘 사이엔 묘한 긴장감도 느껴진다. 지난 20년간 홍콩 영화계를 이끌어 온 라이벌로서의 자존심 탓일까.

겉으론 미소를 교환하며 살가운 표정을 짓지만 속으론 자기 배역에 대한 확신으로 똘똘 뭉친 인상이다. 군살 하나 없는 다부진 몸매의 류더화와 우수에 젖은 듯 서글픈 눈매의 량차오웨이가 만나니 양극(兩極)의 조화 혹은 균형이 떠오른다.

그들이 함께 주연한 류웨이창(劉偉强) 감독의 '무간도(無間道)'(21일 개봉)도 그런 영화다. 두 사람의 상반된 캐릭터가 작품의 주된 동력이다. 그들의 호연에 힘입어 영화는 홍콩 박스오피스 기록을 매일 새로 쓰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깊은 잠에 빠졌던 홍콩 영화계에 숨통을 터준 작품이라는 평도 있다.

'무간도'는 1980.90년대 양산됐던 홍콩 누아르의 계보를 잇는다. 형식이나 내용에서 크게 달라진 점은 없다. 그러나 두 배우의 빼어난 연기와 탄탄한 드라마 때문에 오랜만에 쏠쏠한 홍콩영화를 만난 느낌이다.

"이 한편으로 홍콩영화가 부활했다고 말할 순 없죠. 침체된 홍콩영화의 물꼬를 돌려놓았다고 장담할 수도 없어요. 하지만 퀄리티(質)가 높은 작품을 만들면 반드시 관객이 따라온다는 점을 새삼 일깨워줬죠."(량차오웨이)

"전형적인 홍콩영화입니다. 그런데 메시지는 뚜렷하죠. 출발이 어떻든 과정이 좋지 않으면 결국 대가를 받기 마련이란 거죠. 인과응보랄까. 조연 배우의 뒷받침도 훌륭하고요."(류더화)

'무간도'는 무간지옥(無間地獄)을 뜻하는 불교용어다. 불교의 18층 지옥 가운데 가장 낮은 층의 지옥으로, 끊임없는(無間) 고통에 시달리는 곳이다.

류더화와 량차오웨이는 신분은 극단적으로 다르나 처한 상황은 엇비슷한 인물로 나온다. 류더화는 홍콩의 폭력조직에서 경찰에 침투시킨 유건명 역을, 량차오웨이는 반대로 경찰에서 조직에 극비리에 파견한 진영인 역을 맡았다. 자기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야 하는 사나이들이다. 그것도 10년 동안 다른 인물로 살다 보니 이젠 자신이 누군지 가끔씩 헷갈릴 정도다.

서로 상대를 겨누어야 할 숙적이나 본래의 모습을 잊어버려야 한다는 고통에선 동지다. 상대를 죽여야만 자기가 살 수 있다는 엄혹한 운명에서 비장한 슬픔이 배어나온다. '화양연화''영웅'의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이 류더화의 냉철한 카리스마와 량차오웨이의 섬세한 감수성을 낚아챘다.

"제목은 어렵지만 영화는 명료해요. 순간의 선택에 따라 인생의 결과가 확연하게 달라지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고, 정체가 드러날까 항상 초조해하는 스파이의 삶, 그게 바로 지옥이 아닐까요."(량차오웨이)

"배우는 지옥(무간도)에서 헤매는 사람입니다. 배역에 대한 자신감이나 감독.상대 배우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언제나 불안할 수밖에 없죠. 지금까지의 영화가 모두 그랬어요. 그런데 이번엔 정반대였습니다. 끝없는 즐거움 속에 살았죠."(류더화)

그들의 만남은 이번이 두번째다. '오호장'(원제 五虎將之決裂) 이후 12년 만이다. 주제가를 함께 부르는 등 손발이 잘 맞았다고 서로 치켜세웠다. 또 좋은 시나리오가 있으면 당연히 다시 뭉칠 것이라고 약속했다.

아쉬운 구석을 말했다. 구성이 탄탄하고, 연기도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영화가 사건 중심으로 흘러가는 바람에 캐릭터 간의 갈등.고민이 약해지지 않았냐고 물었다. 량차오웨이의 대답은 딱 한마디. "그래야 속편을 만들죠." 폭소가 터졌다.

"원래 두 시간 반 분량이었으나 극장 측에서 너무 길다고 상영을 못하겠다고 해요. 할 수 없이 1백분으로 줄였죠. 홍콩은 정말 이상한 곳이죠."(류더화)

'무간도'는 할리우드에서도 리메이크 될 예정이다. 미국 배우 가운데 누가 가장 어울릴까. "누구에게 맡겨도 잘하겠죠." 둘 다 싱겁다. 자신들을 대신할 배우를 꼽을 수 없다는 자신감 때문일까.

박정호 기자 <jhlogos@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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