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권석천의 시시각각

NLL이 '이슈 밀어내기' 수단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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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권석천
논설위원

섹스가 등장하면 다른 모든 것은 사라진다. 유명인이 뜨거운 물에 빠지면 물 온도를 더 높이려고 기다리는 요리사가 많다. 유일한 탈출구는 다른 누군가의 곤경 때문에 언론의 관심이 바뀌는 경우다. 미국 법정의 내면을 파헤친 『여론과 법, 정의의 다툼(Spinning the law)』에 나오는 교훈들이다.

 지난달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성추행 사건을 예로 들겠다. 그의 그랩(grab·움켜잡다)은 남양유업 파문과 박근혜 대통령 방미 성과를 일거에 집어삼켰다. 청와대는 언론과 야당이란 요리사 앞에 서야 했다. 당혹스러운 상황은 검찰이 CJ그룹 수사에 착수하면서 종료된다(다른 누군가의 곤경!).

 국가정보원의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는 보다 노골적이다. 지난 14일 수사 결과 발표 후 국정원 선거 개입 의혹이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다. 국정조사를 받게 된 국정원은 20일 여당 측의 발췌본 열람 요청에 응한 데 이어 24일 전문까지 공개한다. 이제 태풍의 눈은 노무현 전 대통령 발언 내용이다.

 한국 사회에서 남북관계의 폭발력은 핵탄두급이다. 섹스는 저리 가라다. 댐에서 방류한 물에 온갖 이슈들이 휩쓸려 내려간다. “대통령이란 사람이 김정일 앞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는 외침을 거스르기는 쉽지 않다. 정부의 힘이 센 건 그래서다. 검사 출신 변호사의 얘기다.

 “정부·여당은 가용 자원이 많아요. 정책이든, 문건이든, 수사든…. 뉴스를 덮을 수 있는 건 뉴스뿐이니까요. 정권 잡으려고 안달하는 것도 다 그거 때문 아닙니까.”

 불법공개가 아니냐는 시비에 국정원은 법적 문제가 없다고 강조한다. 법에 따라 2급 비밀인 회의록 전문을 일반문서로 재분류했다는 것이다. 법적 근거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그 어떤 것도 재분류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법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법정신은 내버린 채 법조항만 갖다 쓰는 건 아닌지에 대한 고민과 반성은 보이지 않는다.

 국정원과 새누리당은 “논란을 촉발시킨 건 민주당”이라고 한다. 민주당 박영선 의원이 “노 전 대통령 NLL(북방한계선) 포기 발언 논란은 국정원과 새누리당이 짠 시나리오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잘못된 주장을 한다고 해서 국가기관이 ‘비밀문서를 까는’ 사유는 될 수 없다. 국론 분열 우려를 공개 이유로 든 것도 부적절하다. 공개 후 국론 분열은 한층 가팔라지고 있지 않은가.

 정부 주도 ‘이슈 밀어내기’는 우유회사의 물량 밀어내기를 뛰어넘는 불공정행위다.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후유증을 남긴다. 밀어내기가 거듭되면 쟁점 하나하나를 심도 있게 논의할 기회를 잃게 된다. 정리되지 않은 이슈들이 좀비처럼 돌아다니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늘 비슷한 주장에 덜미를 잡히고 같은 곳에 걸려 넘어질 뿐이다.

 NLL 문제는 국가안보 차원에서 분명하게 정리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래서 더더욱 다른 이슈를 밀어내는 방편이 돼서도, ‘물타기’ 대상이 돼서도 안 된다. 대통령 말대로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면 이번 회의록 공개의 형식은 과연 온당한지 의문이다. 이슈가 정당하다면 그 이슈를 제기하는 과정도 정당해야 한다.

 또 하나의 물음은 박 대통령이 왜 육성으로 ‘국정원 개혁’을 지시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국가정보기관의 정치 개입은 민주주의 한계선, DLL(Democratic Limit Line)을 침범하는 것이다. “수많은 젊은이가 피로 지키고, 죽음으로 지킨 곳”(박 대통령)은 NLL만이 아니다. 외면한다고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 『여론과 법…』은 경고한다. “여론의 법정은 시즌이 끝나는 법이 없다”고.

 NLL 다음엔 어떤 이슈가 등장할까. 최근 두 달간 키워드의 흐름을 보자. 윤창중→CJ→조세피난처→원전→국정원→NLL. 아무래도 섹스가 무대에 오를 차례다.

권석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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